中说 · 제1권
흠정사고전서자부일
유가 전적
처음에는 사서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대학이 강령을 세우고, 논어가 말을 기록하고, 맹자가 전개하고, 중용이 수렴한다. 이어서 시경·상서·예기와 춘추삼전을 읽는다. 순자·춘추번로·근사록·전습록은 경학 바깥에서 유학이 어떻게 풀려 나갔는지를 보는 몇 갈래 길이다.
欽定四庫全書子部一
흠정사고전서자부일
中説儒家類
중설유가류
提要
제요
【臣】等謹案中説十卷舊本題隋王通撰唐志文中子中説五卷通考及玉海則作十卷與今本合凡十篇末附序文一篇及杜淹所撰文中子世家一篇通子福畤錄唐太宗與房魏論禮樂事一篇通弟績與陳叔達書一篇又録闗子明事一篇末又有其子福畤所撰王氏家書雜録一篇晁公武郡齋讀書志嘗辨通以開皇四年生李徳林以開皇十一年卒通方八嵗而有徳林請見歸援琴鼓盪之什門人皆沾襟事闗朗以太和丁巳見魏孝文帝至開皇四年通生已相隔一百七年而有問禮於朗事薛道衡以仁夀二年出為襄州總管至煬帝即位始召還又隋書載道衡子収初生即出繼族父儒及長不識本生而有仁夀四年通在長安見道衡道衡語其子収事洪邁容齋隨筆又辨唐書載薛収以大業十三年歸唐而世家有江都難作通有疾召薛収共語事王應麟困學紀聞亦辨唐會要載武徳元年五月始改隋太興殿為太極殿而書中有隋文帝召見太極殿事皆證以史傳牴牾顯然今考通以仁夀四年自長安東歸河汾即不復出故世家亦云大業元年一徵又不至而周公篇內乃雲子遊太樂聞龍舟五更之曲阮逸注曰太樂樂署煬帝將遊江都作此曲隋書職官志曰太常寺有太樂署是通大業末年復至長安矣其依託謬妄亦一明證考楊烱集有王勃集序稱祖父通隋秀才髙第蜀郡司戶書佐蜀王侍讀大業末退講萟於龍門其卒也門人諡之曰文中子烱為其孫作序則記其祖事必不誤杜牧樊川集首有其甥裴延翰序亦引文中子曰言文而不極理王道何從而興乎二語亦與今本相合知所謂文中子者實有其人所謂中説者其子福郊福畤等纂述遺言虛相誇飾亦實有其書苐當有唐開國之初明君碩輔不可以虛名動又陸徳明孔頴逹賈公彥諸人老師宿儒佈列館閣亦不可以空談惑故其人其書皆不著於當時而當時亦無斥其妄者至中唐以後漸逺無徴乃稍稍得售其欺耳宋鹹必以為實無其人洪邁必以為其書出阮逸所撰誠為過當講學家或竟以為接孔顏之傳則惑之甚矣據其偽跡炳然誠不足採然大防要不甚悖於理且摹擬聖人之語言自揚防始猶未敢冒其名摹擬聖人之事蹟則自通始乃並其名而僣之後來聚徒講學醸為朋黨以至禍延宗社者通實為之先驅坤之初六履霜堅氷姤之初六繫於金柅録而存之亦足見儒風變古其所由來者漸也乾隆四十六年九月恭校上
【신】등이 삼가 안합니다. 《중설》 십 권은 구본에 제하여 수나라 왕통이 찬한 것으로 하였다. 《당서·예문지》는 《문중자중설》 오 권으로 하고 《문헌통고》와 《옥해》는 곧 십 권으로 하여 지금 이 본자와 상합한다. 전서가 모두 열 편이요 끝에 서문 한 편을 붙이고 및 두엄이 찬한 《문중자세가》 한 편과 왕통의 아들 왕복치가 기록한 《당태종여방위논례악사》 한 편과 왕통의 아우 왕적이 진숙달에게 주는 서신 한 편과 또 《관자명사》 한 편을 기록하고 맨 끝에 오히려 그의 아들 왕복치가 찬한 《왕씨가서잡록》 한 편이 있다. 조공무의 《군재독서지》가 일찍이 변하였다. 왕통은 개황 사 년에 출생하고 이득림은 개황 십일 년에 졸하였으니 당시 왕통이 겨우 여덟 살인데 책 가운데 도리어 이득림이 와서 뵙기를 구하고 왕통이 돌아가 《탕》 이 시를 탄주하여 문인이 모두 눈물이 의금을 적신 일이 있다. 관랑은 태화 정사년에 위효문제에게 나아가 뵈었는데 개황 사 년 왕통이 출생하기까지 이미 백칠 년이 떨어졌는데 책 가운데 도리어 관랑에게 예를 물은 일이 있다. 설도형은 인수 이 년에 양주총관이 되어 나갔고 양제가 즉위함에 이르러 겨우 소환되었다. 또 《수서》가 기록하기를 설도형의 아들 설수는 출생하자마자 족부 설유에게 입적되고 자라서 친아비를 알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책 가운데 도리어 인수 사 년에 왕통이 장안에서 설도형을 회견하고 설도형이 그 아들 설수의 일을 담한 것이 있다. 홍매 《용재수필》이 또 변하였다. 《당서》가 기록하기를 설수가 대업 십삼 년에 당에 귀부하였다 하였는데 《세가》 속에는 도리어 강도의 난이 발생할 때 왕통이 병이 있어 설수를 불러 함께 담화한 일이 있다. 왕응린 《곤학기문》도 또한 변하였다. 《당회요》가 기록하기를 무 덕 원년 오월에 겨우 수나라의 대흥전을 고쳐 태극전이라 이름하였다 하였는데 책 가운데 도리어 수문제가 태극전에서 왕통을 소견한 일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사전을 가져 서로 대조하면 저오가 현연하다. 지금 고찰하면 왕통이 인수 사 년에 장안에서 동으로 하분에 돌아가 이로부터 다시 나오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세가》도 또한 대업 원년에 징소하였으나 그가 또 가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주공편》 속에는 도리어 자유가 태악에 놀아 용주오경의 곡을 들었다 하였다. 완일의 주에 말하기를 태악은 악서로 양제가 장차 강도에 놀 때 이 곡을 지었다 하였다. 《수서·직관지》에 태상사에 태악서가 있다 하였다. 이와 같이 말하면 왕통이 대업 말년에 또 장안에 이르렀다. 그가 의탁하고 미망한 것은 이것도 또한 한 조의 명증이다. 다시 고찰하면 양형의 집 속에 《왕발집서》가 있어 조부 왕통을 칭하여 수나라 수재고제로 촉군사호서좌·촉왕시독을 지내고 대업 말년에 용문에 물러가 강학하여 거세한 뒤 문인이 시하여 문중자로 하였다. 양형은 왕발을 위하여 서를 지은 것이니 조부의 일을 기술함이 반드시 틀리지 않을 것이다. 두목 《번천집》 권수에 그 외질 배연한의 서가 있어 또 문중자의 말을 끌어 말하기를 「글을 말하고도 이치에 미치지 않으면 왕도가 무엇을 따라 흥하겠는가」 하였다. 이 두 구절도 또한 지금의 본자와 상합한다. 이로부터 이른바 문중자는 실로 그 사람이 있고 이른바 《중설》은 그의 아들 왕복교·왕복치 등이 유언을 찬술하고 헛되이 과찬을 더하였으나 또한 실로 그 책이 있음을 안다. 다만 바로 당나라 개국의 초에 당하여 명군과 중신이 허명에 타동되지 않고 다시 육덕명·공영달·가공언 이 사람들은 모두 노사숙유로 관각에 벌렬하여 또한 공담에 미혹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람과 이 책이 당시에 모두 현저하지 않았고 당시도 또한 사람이 그 허망을 질책하지 않았다. 중당 이후에 이르러 연대가 점점 멀고 징험할 곳이 없어 이 기홍의 술이 겨우 점점 팔려 나갔다. 송함이 반드시 실로 그 사람이 없다고 하고 홍매가 반드시 이 책이 완일이 찬한 바라고 함은 실로 지나치다. 강학가가 혹 끝내 그가 공자·안회의 전수를 이었다고 여기면 곧 미혹함이 심하다. 그 위적이 소저함으로 논하면 확실히 채취할 만하지 않으나 그러나 큰 제방은 총히 오히려 심히 도리에 위배하지 않는다. 하물며 성인의 언어를 모의함은 양웅에서 시작되고(저본은 「양방」으로 함 「방」은 「웅」의 탈) 오히려 감히 성인의 명호를 모용하지 않았는데 성인의 사적을 모의함은 도리어 왕통에서 시작되고 또한 명호조차도 참용하였다. 후래에 도를 모아 강학하고 붕당을 양성하여 화환이 종사에 미침에 이르러서는 왕통이 실로 선구이다. 《곤》괘 초륙에 서리를 밟으면 곧 견빙이 장차 이른다 하였고 《구》괘 초륙에 금니에 매인다 하였다. 이 책을 저록하여 보존함도 또한 이로써 유풍이 고래를 개변하는 모양을 볼 만하니 그 유래는 점점 이루어진 것이다. 건륭 사십육 년 구월에 공손히 교상한다.
總纂官【臣】紀昀【臣】陸錫熊【臣】孫士毅
총찬관【신】기윤【신】육석웅【신】손사의
總校官【臣】陸費墀
총교관【신】육비치
中説序
중설서
周公聖人之治者也后王不能舉則仲尼述之而周公之道明仲尼聖人之備者也後儒不能達則孟軻尊之而仲尼之道明文中子聖人之修者也孟軻之徒歟非諸子流矣蓋萬章公孫丑不能極師之奧盡録其言故孟氏章句略而多闕房杜諸公不能臻師之美大宣其敎故王氏續經抑而不振中説者子之門人對問之書也薛収姚義集而名之唐太宗正觀初精修治具文經武略髙出近古若房杜李魏二溫王陳輩迭為將相實永三百年之業斯門人之功過半矣正觀二年【觀去聲】御史大夫杜淹始序中説及文中子世家未及進用為長孫無忌所抑【長上聲】而淹尋卒故王氏經書散在諸孤之代莫得聞焉二十三年太宗沒子之門人盡矣惟福畤兄弟【福畤文中子幼子畤音止】傳授中説於仲父凝始為十卷今世所傳本文多殘缺誤以杜淹所撰世家為中説之序【杜正觀三年卒今世所傳本乃正觀二十三年序】又福畤於仲父凝得闗子明傳凝因言闗氏卜筮之驗且記房魏與太宗論道之美亦非中説後序也蓋同藏緗帙【緗音相帙直質反】卷目相亂遂誤為序焉逸家藏古編尤得精備亦得十篇實無二序以章詳測文中子世家乃杜淹授與尚書陳叔達編諸隋書而亡矣【叔達依遷史人隋書今亡】闗子明事具於裴睎先賢傳今亦無存故王氏諸孤痛其將墜也因附於中説兩間且曰同志淪殂【殂音徂】帝閽悠邈文中子之敎鬱而不行籲可悲矣此有以知杜淹見抑而續經不傳諸王自悲而遺事必録後人責房魏不能揚師之道亦有由焉夫道之深者固當年不能窮功之逺者必異代而後顯方當聖時人文復古則周孔至治大備得以隆之昔苟卿揚雄二書尚有韓愈柳宗元刪定李軌楊倞【倞其亮反】況文中子非荀揚比也豈學者不能伸之乎是用覃研蘊奧引質同異為之註解以翼斯文夫前聖為後聖之備古文乃今文之脩未有離聖而異驅捐古而近習而能格於治者也皇宋御天下尊儒尚文道大淳矣修王削霸政無雜矣抑又跨唐之盛而使文中之徒遇焉彼韓愈氏力排異端儒之功者也故稱孟子能拒楊墨而功不在禹下孟軻氏儒之道者也故稱顔囘謂與禹稷同道愈不稱文中子其先功而後道歟猶文中子不稱孟軻道存而功在其中矣唐末司空圖嗟功廢道哀乃明文中子聖矣五季經亂逮乎削平則柳仲塗宗之於前孫漢公廣之於後皆雲聖人也然未及盛行其敎噫知天之髙必辯其所以髙也子之道其天乎天道則簡而功密矣門人對問如日星麗焉雖環周萬變不出乎天中今推防揆影庶髣髴其端乎大哉中之為義在易為二五在春秋為權衡在書為皇極在禮為中庸謂乎無形非中也謂乎有象非中也上不蕩於虛無下不局於器用惟變所適惟義所在此中之大略也中説者如是而已李靖問聖人之道子曰無所由亦不至於彼又問彼之説曰彼道之方也必也無至乎魏徵問聖人憂疑子曰天下皆憂疑吾獨不憂疑乎退謂董常曰樂天知命吾何憂窮理盡性吾何疑舉是深趣可以類知焉或有執文昩理以模範論語為病此皮膚之見非心解也逸才微志勤曷究其極中存疑闕庸俟後賢仍其舊篇分為十卷謹序
주공은 성인 가운데 능히 치도를 행해 낸 사람이다. 후대의 왕이 그의 치를 거행하지 못하자 공자가 곧 이를 기술하여 주공의 도가 이에 겨우 현명해졌다. 공자는 성인 가운데 완비한 사람이다. 후대의 유자가 그의 도를 통달하지 못하자 맹가가 곧 그를 숭숭하여 공자의 도가 이에 겨우 현명해졌다. 문중자는 성인 가운데 능히 스스로 수성한 사람이니 마땅히 맹가 일류의 사람으로 헤아려야 할 것이다. 제자의 그 무리가 아니다. 다만 만장·공손추가 스승의 심오를 다하고 말을 전부 기록하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맹자의 장구가 간략하고 많이 궐루가 있다. 방현령·두여회 여러분이 스승의 전미에 이르고 그의 가르침을 크게 선양하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왕씨 속경이 억압되어 진작하지 못하였다. 《중설》은 문중자의 문인 문답의 책으로 설수·요의에 의하여 휘집하고 또 그 제명을 주었다. 당태종 정관 초에 정심으로 치구를 수명하고 문경무략이 근고보다 높았다. 방현령·두여회·이정·위징·온대아온언박 형제·왕규·진숙달 이 무리 사람과 같이 윤류로 장상을 하여 실로 삼백 년의 기업을 전기하였으니 이 속에 문인의 공로가 반이 넘는다. 정관 이 년【주음: 「관」은 거성으로 읽는다】에 어사대부 두엄이 비로소 《중설》과 《문중자세가》를 위하여 서를 지었는데 아직 진용에 이르지 못하여 곧 장손무기에게 압제되었다【주음: 「장」은 상성으로 읽는다】. 두엄이 오래지 않아 곧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왕씨의 경서가 산락하여 각 유고의 시대에 있어 능히 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십삼 년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니 문중자의 문인도 또한 모두 없었다. 다만 왕복치 형제【복치는 문중자의 막내아들 「치」의 음은 지】만이 《중설》을 숙부 왕응에게 전수하여 이에 겨우 편하여 십 권을 이루었다. 당금 세상에 전하는 본자는 글자에 많이 잔결이 있어 그릇하여 두엄이 찬한 《세가》를 당하여 《중설》의 서로 삼았다【두엄은 정관 삼 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금세에 전하는 본은 도리어 정관 이십삼 년의 서이다】. 또 왕복치가 숙부 왕응의 곳에서 《관자명전》을 얻었는데 왕응이 이로 인하여 관씨의 복시응험의 일을 강하고 또 방현령·위징과 태종이 도를 논한 아름다움을 기록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중설》의 후서가 아니다. 대개 이 글자들이 함께 담황의 서의의 서투 속에 감추어져【주음: 「상」은 음 상 「질」은 치질반】 권차편목이 서로 착란하여 곧 그릇하여 서로 삼았다. 나 완일의 집에 고편을 감추어 더욱 정비하여 또한 열 편으로 실로 저 두 편의 서가 없다. 장절을 헤아려 상세히 추측하면 《문중자세가》는 두엄이 상서 진숙달에게 교여하여 《수서》에 편진하여 망일하였다【진숙달이 《사기》의 체례에 의조하여 《수서》에 편입하였으나 지금 망일하였다. 저본 「인」은 「입」의 탈】. 《관자명사》는 배희 《선현전》 속에 기재되었으나 지금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왕씨 여러 유고가 이 글자들이 장차 추락할 것을 통석하여 곧 《중설》의 중간 두 곳에 붙이고 또한 말하기를 동지가 윤망하고【주음: 「조」는 음 조】 궁문이 유원하여 문중자의 가르침이 울결하여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 아 슬프다. 이로부터 알 수 있다. 두엄이 압제되니 속경이 곧 유전할 수 없었고 왕가가 스스로 비상하니 유사가 곧 반드시 기록하였다. 후인이 방현령·위징이 능히 스승의 도를 현양하지 못함을 책함도 또한 연고가 있는 것이다. 도가 깊은 것은 본래 당년에 다할 수 없고 공이 먼 것은 반드시 다른 한 대에 이르러 겨우 현현한다. 바로 성명의 시대에 당하여 인문이 고대로 돌아가려 하면 곧 주공·공자의 지치가 완전히 구비하니 이로써 그것을 숭숭할 만하다. 종전 순경·양웅 두 부의 책에도 오히려 한유·유종원이 삭제하고 이귀·양량이 주를 지었는데【주음: 「량」은 기량반】 하물며 문중자는 순경·양웅이 비길 수 있는 바가 아니니 학자가 어찌 능히 그를 신장하지 못하겠는가. 이로 인하여 내가 깊이 온오를 탐연하고 인증하여 동이를 비교하여 그를 위하여 주해를 지어 이로써 이 문장을 보익한다. 전대의 성인은 후대 성인의 준비요 고문은 금문의 수성이다. 종래 성인을 떠나 따로 한 길을 가고 고대를 포기하여 근습에 영합하여 능히 치에 이른 것이 없다. 대송이 천하를 통어하고 유를 존하고 문을 숭하여 도가 이미 순후하다. 왕도를 닦고 패도를 깎아 정이 이미 박잡하지 않다. 또한 당나라의 성세를 월월하여 문중자 일파의 사람이 우합을 얻게 하였다. 저 한유는 힘써 이단을 배척하니 이것은 유자 가운데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능히 양묵을 거절함을 칭하여 공로가 대우 아래에 있지 않다 하였다. 맹가는 유자 가운데 도를 얻은 사람이니 그러므로 안회와 우·직이 도가 같음을 칭한다. 한유가 문중자를 칭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먼저 공을 보고 뒤에 도를 본 것인가. 마치 문중자가 맹가를 칭하지 않은 것과 같이 도가 이미 존하면 공도 또한 그 가운데 있다. 당말 사공도가 공이 폐기되고 도가 매몰됨을 감탄하여 비애 가운데 겨우 명백히 설하였다. 문중자는 성인이다. 오대가 전란을 경력하여 삭평한 뒤에 이르러 유개 자 중도가 앞에서 그를 종봉하고 손하 자 한공이 뒤에서 그를 추광하여 모두 문중자는 성인이라 하였으나 아직 미쳐 그의 가르침을 성행하지 못하였다. 아. 하늘의 높음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그것이 무엇으로 높은가를 변명해야 한다. 문중자의 도는 대개 하늘인가. 천도는 간약하고 공효가 세밀하다. 문인의 대문은 일성이 하늘에 붙은 것과 같아 비록 환요하여 만변하나 하늘의 중앙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규를 미루어 그림자를 재는데 저본은 「추방규영」으로 하고 「방」은 의심컨대 「규」의 탈이니 서기 능히 방불하여 일점의 단예를 볼 것이다. 크도다 「중」 이 글자의 의의여. 《주역》에서는 이·오 두 효요 《춘추》에서는 권형이요 《상서》에서는 황극이요 《례기》에서는 중용이다. 그것을 무형이라 하면 곧 중이 아니요 그것을 유상이라 해도 또한 중이 아니다. 위로 허무에 유탕하지 않고 아래로 기용에 국한하지 않으며 다만 변화가 적합한 곳을 따라 달리고 다만 의가 있는 곳에 멈추니 이것이 곧 「중」의 대략이다. 《중설》도 또한 지나지 않고 이와 같을 뿐이다. 이정이 성인의 도를 물으니 문중자가 말하기를 「달릴 길이 없고 또 저것에 이르지 않는다」 하였다. 또 저것이 무슨 뜻인가 물으니 말하기를 「저것은 도의 방향이니 반드시 말하면 가는 곳이 없음인가」 하였다. 위징이 성인의 근심과 의심을 물으니 문중자가 말하기를 「천하가 모두 근심하고 모두 의심하니 내가 어찌 홀로 근심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물러나 동상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하늘을 즐기고 명을 알면 내가 무엇을 근심하며 이치를 다하고 성을 다하면 내가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이 깊은 취를 거출하면 그 나머지는 유추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글자를 붙잡고 의리에 어두워 모방 《논어》를 모병으로 여기니 이것은 피부 위의 견해요 마음속의 통해가 아니다. 나 완일은 재식이 미천하고 지향이 근고하여 어찌 능히 극처에 궁구하겠는가. 중간에 의궐을 남겨 이로써 후래의 현인을 기다린다. 여구로 원래의 편차를 따라 나누어 십 권으로 한다. 삼가 서한다.
欽定四庫全書
흠정사고전서
中說卷一
중설권일
宋阮逸注
송나라 완일 주
王道篇
왕도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