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지해(經世之亥) 二千二百四十四
甲午 晉武帝十年,吳王皓十年。晉分幽州,城平州。乙未 晉改元咸寧,吳改元天冊。丙申 晉東西夷十七國內附。丁酉 晉四夷內附。吳改元天紀,將邵凱、夏祥逃入於晉。戊戌 吳將劉翻、祖始逃入於晉。己亥 晉命賈充督楊渾、琅玡王伸、王戎、胡奮、杜預、唐彬、王浚七將兵二十萬,伐吳。是年,汲人發魏襄王冢,得書七十五卷。
갑오년(甲午年)은 진무제 재위 10년, 오주 손호 10년, 274년이다. 진이 유주(幽州)의 땅을 나누어 따로 평주(平州)를 쌓았다. 을미년(乙未年, 275년), 진이 원년을 고쳐 「함녕(咸寧)」, 오가 원년을 고쳐 「천책(天冊)」이라 했다. 병신년(丙申年, 276년), 동서 외족(外族) 십칠 국이 진나라에 귀부했다. 정유년(丁酉年, 277년), 사방의 이족이 또 귀부하러 왔다. 오는 원년을 고쳐 「천기(天紀)」라 하고, 오의 장수 소개(邵凱)·하상(夏祥)이 배반하여 진으로 달아났다. 무술년(戊戌年, 278년), 오의 장수 유번(劉翻)·조시(祖始)가 또 진나라로 달아나니, 손호가 정사를 잔학하게 하여 인심이 이산했다. 기해년(己亥年, 279년), 진무제가 가충에게 명하여 왕혼(王渾)(저본은 양혼(楊渾))·낭야왕(琅玡王) 사마주(司馬伷)(저본은 신(伸))·왕융(王戎)·호분(胡奮)·두예(杜預)·당빈(唐彬)·왕준(王濬) 일곱 길의 대군 합쳐 이십만 인을 통솔하여 오를 치게 했다. 이 해에 또한 급군(汲郡) 사람이 위양왕(魏襄王)의 무덤을 도굴하여 죽간의 고서 칠십오 권을 얻었으니――이가 후세에 이르는 「급총서(汲塚書)」이며, 《죽서기년(竹書紀年)》이 곧 여기서 나왔다.
庚子 晉平吳,徙孫皓於洛陽,改元太康。辛丑。壬寅 東西夷二十九國修貢。山濤為司徒,衛瓘為司空。賈充卒。癸卯 孫皓卒。魏舒為司徒。甲辰 乙巳 丙午 丁未 戊申。己酉 汝南王亮為司馬,假黃鉞。庚戌 改元太熙。武帝崩,太子衷踐位,是謂惠帝,冊妃賈氏為皇后,改元永熙。葬武帝於峻陵。王渾為司徒,何邵為太師,裴楷為少師,和嶠為少保,王戎為少傅,衛瓘為太保,石鑑為司空。
경자년(庚子年, 280년), 진이 오를 멸하고 손호를 낙양으로 옮기며 원년을 고쳐 「태강(太康)」이라 했다――한말 이래 백 년 가까운 분열이 이로써 일통에 돌아갔다. 신축년(辛丑年, 281년)은 일이 없었다. 임인년(壬寅年, 282년), 동서 이십구 국이 조공하러 왔다. 산도(山濤)가 사도, 위관(衛瓘)이 사공이 되고 권신 가충이 세상을 떠났다. 계묘년(癸卯年, 283년), 손호가 낙양에서 죽었다. 위서(魏舒)가 사도가 되었다. 갑진·을사·병오·정미·무신 다섯 해(284~288년)는 큰일 없이 기록할 것이 없으니, 참으로 태강 승평의 세상이었다. 기유년(己酉年, 289년),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이 대사마가 되어 황월을 받았다. 경술년(庚戌年, 290년)에 원년을 고쳐 「태희(太熙)」라 했다. 진무제가 붕어하고 태자 사마충이 즉위하니 곧 진혜제이며, 태자비 가남풍을 책립하여 황후로 삼고 원년을 고쳐 「영희(永熙)」라 하고, 무제를 준양릉(峻陽陵)(저본은 준릉(峻陵))에 장사했다. 조정은 왕혼을 사도, 하소(何劭)를 태사(太師), 배해(裴楷)를 소사(少師), 화교(和嶠)를 소보(少保), 왕융을 소부(少傅), 위관을 태보(太保), 석감(石鑑)을 사공으로 삼았다.
辛亥 改元永平。皇后賈氏專制,夷十二大臣族,太傅楊駿、太保衛瓘、汝南王亮皆被戮焉。廢太后楊氏為庶人,徙之金墉。遣諸王就國。改元元康。趙王倫為征西將軍。壬子 賈后弒皇太后楊氏於金墉。癸丑 甲寅。乙卯 武庫火。丙辰 張華為司空。秦雍寇亂,齊萬年稱兵涇陽,楊茂搜稱兵百頃。丁巳 王戎為司徒,何劭為僕射。戊午。
신해년(辛亥年, 291년)에 원년을 고쳐 「영평(永平)」이라 했다. 가황후(賈皇后)가 조정을 독차지하여 잇달아 십이 집의 대신을 주멸하니, 태부 양준(楊駿)·태보 위관·여남왕 사마량이 모두 죽임당하는 반열에 들었다. 또 무제의 양태후(楊太后)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금용성(金墉城)에 유금했다. 제번왕에게 명하여 각기 봉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같은 해 원년을 고쳐 「원강(元康)」이라 하고,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이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나갔다. 팔왕지란의 화근이 이로부터 묻혔다. 임자년(壬子年, 292년), 가후가 금용성에서 양태후를 해쳤다. 계축·갑인 두 해(293, 294년)는 일이 없었다. 을묘년(乙卯年, 295년), 낙양 무고(武庫)에 불이 나서 역대의 보기(寶器)가 다 타버렸다. 병진년(丙辰年, 296년), 장화(張華)가 사공이 되었다. 관중의 진주(秦州)·옹주(雍州) 호한(胡漢) 잡거의 땅에 대란이 일어나, 저인(氐人) 제만년(齊萬年)이 경양(涇陽)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구지(仇池)의 저수(氐帥) 양무수(楊茂搜)가 백경(百頃)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정사년(丁巳年, 297년), 왕융이 사도, 하소가 상서복야(尚書僕射)가 되었다. 무오년(戊午年, 298년)은 일이 없었다.
己未 賈后廢皇太子遹為庶人,及其二子送之金墉。裴□為僕射。庚申 改元永康。皇后賈氏徙皇庶人於許昌,殺之。趙王倫、梁王彤廢皇后賈氏為庶人,送金墉,殺之。誅宰相張華,及僕射裴□、侍中賈謐,又誅嵇康、呂安、石崇、潘岳於東市。倫假黃鉞,稱國相,專制。以彤為太宰,冊羊氏為皇后。賈氏黨趙廞以成都叛。
기미년(己未年, 299년), 가후가 계교를 부려 황태자 사마유(司馬遹)를 무고하여 폐하고 서인으로 하며, 그의 두 아들까지 함께 금용성에 가두어 보냈다. 배외(裴頠)(저본은 이 글자가 궐함)가 상서복야가 되었다. 경신년(庚申年, 300년)에 원년을 고쳐 「영강(永康)」이라 했다. 가후가 이미 서인으로 폐한 태자를 허창으로 옮겨 해를 가했다. 조왕 사마륜·양왕(梁王) 사마융(司馬肜)이 이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가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금용성에 보내 사사하고, 아울러 재상 장화·복야 배외·시중(侍中) 가밀(賈謐)을 주살하고, 또 동시(東市)에서 석숭(石崇)·반악(潘岳) 등의 명사를 처형했다――문중에 나란히 거론된 혜강(嵇康)·여안(呂安)은 실은 조위 말년에 죽은 것으로, 소옹이 여기서 연대를 매긴 것은 잘못이다. 사마륜은 황월을 받고 스스로 상국을 칭하여 조정을 독단하며, 사마융을 태재(太宰)로 삼고 양씨(羊氏)를 책립하여 황후로 삼았다. 가씨의 당우 조신(趙廞)은 성도에서 땅에 의거하여 반역했다.
辛酉 趙王倫竊命,徙帝於金墉,改元建始。齊王冏、成都王穎、河間王顒兵入,誅趙王倫及其黨,迎帝反正。冏大司馬,專制,以穎為大將軍,顒為太尉,改元永寧。流人李特殺趙廞於成都。張軌以梁州叛。壬戌 長沙王乂、河間王顒、成都王穎、新野王歆、范陽王虓兵入,誅齊王冏,送其族於金墉,殺之。乂稱太尉,專制,改元太安。流人李特以六郡稱牧廣漢。癸亥 河間王顒、成都王穎、東海王越執長沙王乂,送之金墉,殺之。顒稱太宰,專制於長安。陸機、陸云兵死。石冰以揚、徐亂。李特攻成都不克,死,子雄繼。
신유년(辛酉年, 301년), 조왕 사마륜이 제위를 찬탈하고 진혜제를 금용성으로 옮기며 원년을 고쳐 「건시(建始)」라 했다.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이 군사를 일으켜 경에 들어가 사마륜과 그 당우를 주살하고 혜제를 맞아 복위시켰다. 사마경은 대사마가 되어 정사를 독차지하고, 사마영을 대장군, 사마옹을 태위로 삼으며 원년을 고쳐 「영녕(永寧)」이라 했다. 유민(流民)의 수령 이특(李特)이 성도에서 조신을 죽였다. 장궤(張軌)가 주에 의거하여 자립했다(저본은 「양주(梁州)로 반역하다」로 하지만 실은 양주자사(涼州刺史)이다)――뒤의 전량(前涼)이 곧 여기서 비롯된다. 임술년(壬戌年, 302년),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하간왕 옹·성도왕 영·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歆)·범양왕(范陽王) 사마효(司馬虓)가 군사를 연합하여 경에 들어가 제왕 경을 주살하고 그 일족을 금용성에 가두어 보내 처형했다. 사마예는 스스로 태위를 칭하여 조정을 독차지하고 원년을 고쳐 「태안(太安)」이라 했다. 이특이 파촉 육 군의 유민으로 스스로 익주목(益州牧)을 칭하고 광한(廣漢)을 차지했다. 계해년(癸亥年, 303년), 하간왕 옹·성도왕 영·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모의하여 장사왕 예를 사로잡아 금용성에 보내 죽였다. 사마옹은 스스로 태재를 칭하고 장안에서 조정을 멀리 제어했다. 명사 육기(陸機)·육운(陸雲)이 군중에서 죽었다. 석빙(石冰)이 양주·서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특이 성도를 쳐서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니, 그 아들 이웅(李雄)이 남은 무리를 이어 통솔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권육중(卷六中)
관물편(觀物篇) 삼십삼 이운경세(以運經世) 구
경원지갑(經元之甲) 일 경회지오(經會之午) 칠
경운지신(經運之辛) 일백팔십팔(一百八十八)
경세지자(經世之子) 二千二百四十五
甲子 晉惠帝十四年,河間王顒廢皇后羊氏及皇太子覃,徙之金墉,表成都王穎為太弟,加九錫,鎮鄴。改元永安。右衛將軍陳軫復羊氏皇后及覃太子,大會司徒王戎及東海王越、高密王簡、平昌公模、吳王晏、豫章王熾、襄陽王范、左僕射荀藩八部兵,奉帝北伐鄴,師敗於湯陰,嵇紹死之。帝如北軍,穎以帝歸鄴,改元建武。顒將張方入洛,復廢皇后羊氏及覃太子。安北將軍王浚、東瀛公騰以烏丸兵攻鄴,穎師敗,帝還洛陽。河間王使張方徙帝西都長安,亦復羊氏皇后及永安年號,廢穎太弟,以豫章王熾為太弟,改元永興。王戎豫朝政。始分東西臺。是年,李雄逐羅尚於成都,稱王;單于左賢王劉淵稱王離石,國曰漢,元曰元熙。
갑자년(甲子年)은 진혜제 재위 14년, 304년이다. 하간왕 사마옹이 양황후(羊皇后)와 황태자 사마담(司馬覃)을 폐하고 그들을 금용성에 유금하며, 상표하여 성도왕 사마영을 세워 황태제(皇太弟)로 삼고 구석을 더하여 업성을 진수하게 하고 원년을 고쳐 「영안(永安)」이라 했다. 우위장군(右衛將軍) 진진(陳眕)(저본은 진진(陳軫))이 양황후와 태자 사마담의 명위를 회복하고, 사도 왕융 및 동해왕 사마월·고밀왕(高密王) 사마간(司馬簡)·평창공(平昌公) 사마모(司馬模)·오왕(吳王) 사마안(司馬晏)·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熾)·양양왕(襄陽王) 사마범(司馬範)·좌복야 순번(荀藩) 여덟 길의 병마를 규합하여 혜제를 받들어 북으로 업성을 쳤으나, 탕음(湯陰)에서 크게 패하고 시중 혜소(嵇紹)가 몸으로 황제를 가리고 죽었다. 혜제가 적군 가운데 빠지니 사마영이 그를 업성으로 데려가 원년을 고쳐 「건무(建武)」라 했다. 사마옹의 부장 장방(張方)이 낙양에 쳐들어가 다시 양황후와 태자를 폐했다. 안북장군(安北將軍) 왕준(王浚)·동영공(東瀛公) 사마등(司馬騰)이 오환(烏桓) 기병을 빌려 업성을 진공하여 사마영이 패하고, 혜제가 겨우 낙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간왕이 또 장방을 보내 혜제를 장안으로 끌고 가고, 다시 양씨를 세워 황후로 삼아 「영안」 연호를 회복하고, 사마영의 황태제 지위를 폐하며 예장왕 사마치를 황태제로 하고 원년을 고쳐 「영흥(永興)」이라 했다. 왕융이 조정에 참여하여 조정이 동서 이태(二台)를 나누어 두기 시작했다. 이 해에 또한 이웅이 성도에서 익주자사 나상(羅尚)을 몰아내고 스스로 성도왕(成都王)을 칭했다. 흉노 선우(單于) 좌현왕(左賢王) 유연(劉淵)이 이석(離石)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한」, 연호를 「원희(元熙)」라 하니――오호십육국의 난세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乙丑 東海王越嚴兵徐方,范陽王虓抗師許昌,成都王穎擁兵河間北,河間王顒又復廢羊氏皇后,以穎為大將軍,都督河北。虓、越將周權入洛,又復羊氏皇后。洛陽令何喬殺周權,又廢羊氏皇后。虓、越兵攻穎不已,穎敗,棄鄴,走洛陽。虓、越攻洛陽。穎奔顒於長安。漢劉淵攻晉劉琨於板橋,不利。丙寅 東海王越、范陽王虓兵攻長安。河間王顒、成都王穎走南山。虓、越將祁弘、宋胄以帝東還洛陽,復以羊氏為皇后,改元光熙。越稱太傅,錄尚書事,專制。虓為司空,卒。越遂弒帝,立太弟熾,是謂懷帝。引溫羨為司徒,王衍為司空。顒、穎野死。李雄稱帝成都,國曰蜀,元曰太武,謂之後蜀。
을축년(乙丑年, 305년), 동해왕 사마월이 서주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범양왕 사마효가 허창을 지켜 거수하며, 성도왕 사마영이 하북에 군사를 둔하고, 하간왕 사마옹이 또 양황후를 폐하고 사마영을 대장군·도독하북(都督河北)으로 삼았다. 사마효·사마월의 부장 주권(周權)이 낙양에 쳐들어가 다시 양씨를 세워 황후로 했다. 낙양령(洛陽令) 하교(何喬)가 주권을 죽이니 양후가 또 폐해졌다. 효·월이 사마영을 쳐서 그치지 않으니 영이 패하여 업성을 버리고 낙양으로 달아나고, 효·월이 돌아 낙양을 치니 사마영은 오직 장안의 사마옹에게로 달아날 뿐이었다. 한왕 유연이 판교(板橋)에서 진의 장수 유곤(劉琨)을 진공했으나 손에 넣지 못했다. 병인년(丙寅年, 306년), 사마월·사마효가 군사를 합쳐 장안을 진공하니 사마옹·사마영이 종남산(終南山) 속으로 달아났다. 효·월의 부장 기굉(祁弘)·송주(宋胄)가 혜제를 호위하여 동쪽 낙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양씨를 세워 황후로 하며 원년을 고쳐 「광희(光熙)」라 했다. 사마월은 스스로 태부·록상서사를 칭하여 조정을 독차지했다. 사마효는 사공에 임명되자마자 죽었다. 사마월이 곧 혜제를 독살하고 황태제 사마치를 세워 즉위시켰으니 곧 진회제(晉懷帝)이며, 온선(溫羡)을 기용하여 사도, 왕연(王衍)을 사공으로 삼았다. 사마옹·사마영도 또한 잇달아 들판에서 죽었다. 십육 년 이어진 팔왕지란이 여기서 끝났다. 같은 해 이웅이 성도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성(大成)」, 연호를 「태무(太武)」라 하니 사(史)에 성한(成漢)이라 이른다――곧 문중에서 말하는 후촉(後蜀)이다.
丁卯 晉改元永嘉。東海王越稱大丞相,鎮許昌。以後父梁芬為太尉。成都王黨汲桑陷鄴。王彌稱兵青、徐。漢劉淵破晉河東諸郡。晉劉琨獨保晉陽。戊辰 劉淵稱帝蒲子,改元永鳳,拔晉平陽,居之。王彌、石勒附於漢。石勒攻常山,王彌攻洛陽,焚建春門。己巳 東海王越入洛,殺大臣十餘人,以左僕射山簡徵東大將軍,都督荊州,南鎮襄陽。漢劉淵改元河瑞。石勒兵出鉅鹿,王彌兵出上黨,劉聰兵出壺關,同攻晉洛陽。
정묘년(丁卯年, 307년), 진이 원년을 고쳐 「영가(永嘉)」라 했다. 동해왕 사마월이 스스로 대승상을 칭하고 나가 허창을 진수하며, 회제의 장인 양분(梁芬)을 태위로 삼았다. 성도왕의 옛 부하 급상(汲桑)이 업성을 함락했다. 왕미(王彌)가 청주·서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한의 임금 유연이 진의 하동 여러 군을 격파했다. 병주자사 유곤이 진양을 외롭게 지켜 북방에 남은 유일한 진실(晉室)의 거점이 되었다. 무진년(戊辰年, 308년), 유연이 포자(蒲子)에서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영봉(永鳳)」이라 하며, 평양(平陽)을 빼앗아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다. 왕미와 갈인(羯人) 석륵(石勒)이 잇달아 한나라에 귀부했다. 석륵이 상산을 진공하고 왕미가 낙양을 진공하여 건춘문(建春門)을 불살랐다. 기사년(己巳年, 309년), 사마월이 낙양에 들어가 일거에 조정 대신 십여 인을 주살하고, 좌복야 산간(山簡)을 정동대장군·도독형주(都督荊州)로 삼아 남쪽 형양(襄陽)을 진수했다. 한은 원년을 고쳐 「하서(河瑞)」라 했다. 석륵이 거록(巨鹿)에서 나오고, 왕미가 상당(上黨)에서 나오고, 유총(劉聰)이 호관(壺關)에서 나와, 세 길로 합하여 낙양을 쳤다――서진의 경사가 이로부터 해마다 포위되었다.
庚午 東海王越徵兵天下,諸侯咸無從者,自率兵出許昌。漢劉淵卒,子和繼。叔楚王聰殺和代立,改元光興,以北海王義為皇太弟,劉曜為相國,石勒為大將軍。辛未 天下亂。晉詔兗州苟晞會諸侯兵伐許昌,會東海王越卒,乃止。是年,洛陽陷。王衍為軍帥,王師十二敗,帝及傳國六璽皆沒於寇。長安亦陷,南陽王模亦沒於寇。漢劉曜、王彌、石勒拔晉洛陽,俘其帝於平陽,改元嘉平。劉曜拔晉長安,保之。石勒害王彌於己吾,而並其眾。蜀李雄拔晉梓潼及涪城,改元玉衡。
경오년(庚午年, 310년), 동해왕 사마월이 천하에 군사를 징발했으나 각 주군이 마침내 하나도 응하는 데가 없어, 오직 친히 소부를 거느리고 나가 허창에 둔할 뿐이었다. 한의 임금 유연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유화(劉和)가 뒤를 이었으나, 숙부 초왕(楚王) 유총이 유화를 죽이고 자립하여 원년을 고쳐 「광흥(光興)」이라 하고, 북해왕(北海王) 유예(劉乂)(저본은 의(義))를 세워 황태제로 하고, 유요(劉曜)를 상국, 석륵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신미년(辛未年, 311년),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진 조정이 조를 내려 연주자사 구희(苟晞)에게 명하여 제후의 군사를 회합하여 허창에 둔한 사마월을 치게 하려 했으나, 마침 사마월이 병사하여 그쳤다. 이 해 낙양이 함락되었다――왕연이 군사를 통솔했으나 진군이 십이 전(戰)에 모두 패하고, 회제와 전국육새(傳國六璽)가 함께 적의 손에 떨어졌으며, 장안도 이어서 함락되고 남양왕 사마모가 포로가 되었다. 한의 장수 유요·왕미·석륵이 낙양을 격파하고 진회제를 평양으로 사로잡아 가고, 한은 원년을 고쳐 「가평(嘉平)」이라 했다――사에 「영가지란(永嘉之亂)」이라 이른다. 유요가 또 장안을 함락하여 지켰다. 석륵이 기오(己吾)에서 왕미를 해치고 그 부중을 삼켰다. 성한의 이웅이 진의 재동(梓潼)·부성(涪城)을 함락하고 원년을 고쳐 「옥형(玉衡)」이라 했다.
壬申 晉懷帝在平陽。賈疋逐劉曜於長安三輔,與閻鼎、梁芬、梁綜、曲允共奉秦王鄴為皇太子,以入長安。鎮東將軍琅玡王睿帥亡眾大集壽春。苟晞保蒙城,不利,降於石勒。劉琨保晉陽,不利,奔常山。拓跋猗盧以兵六萬來救,大敗劉曜、劉粲於狼猛。劉琨復保陽曲。漢劉聰納劉殷女二人為皇后,孫四人為貴妃,拔晉太原,復失之。癸酉 晉懷帝死於平陽,皇太子鄴稱帝長安,是謂愍帝,改元建興。以梁芬為司徒,曲允為使持節領軍、錄尚書事,索為尚書左僕射,琅玡王睿為左丞相,都督陝東諸軍事。南陽王保為右丞相,都督陝西諸軍事。山東郡縣悉陷於寇。漢石勒鎮襄國。曹嶷攻下三齊,據有廣固。
임신년(壬申年, 312년), 진회제가 여전히 평양에 갇혀 있었다. 진의 신하 가족(賈疋)이 유요를 장안 일대의 삼보(三輔)에서 몰아내고, 염정(閻鼎)·양분·양종(梁綜)·곡윤(麴允)(저본은 곡윤(曲允))과 함께 진왕(秦王) 사마업(司馬鄴)을 옹립하여 황태자로 삼아 호송하여 장안에 들였다. 진동장군(鎮東將軍) 낭야왕 사마예(司馬睿)가 유망한 사람들을 거두어 수춘에 크게 모였다――이는 동진 세움의 선성(先聲)이다. 구희가 몽성(蒙城)에 지켜 거수하다 실리를 잃고 석륵에 항복했다. 유곤이 진양을 지키다 실리를 잃고 상산으로 달아났다. 대왕(代王) 탁발의로(拓跋猗盧)가 군사 육만을 내어 구하러 와서 낭맹(狼猛)에서 유요·유찬(劉粲)을 크게 격파하여, 유곤이 겨우 물러가 양곡(陽曲)을 지킬 수 있었다. 한의 임금 유총이 한 번에 유은(劉殷)의 두 딸을 맞아 황후, 네 손녀를 귀비로 하니, 황음함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진의 태원을 함락했으나 곧 또 잃었다. 계유년(癸酉年, 313년), 회제가 평양에서 해를 당하고, 황태자 사마업이 장안에서 즉위했으니 곧 진민제(晉愍帝)이며, 원년을 고쳐 「건흥(建興)」이라 하고, 양분을 사도, 곡윤을 사지절영군(使持節領軍)·록상서사, 색침(索綝)(저본은 침(綝) 자를 빠뜨림)을 상서좌복야, 낭야왕 사마예를 좌승상·도독섬동제군사(都督陝東諸軍事), 남양왕 사마보(司馬保)를 우승상·도독섬서제군사(都督陝西諸軍事)로 삼았다. 효산(崤山) 이동의 군현이 모두 윤함(淪陷)했다. 한의 장수 석륵이 양국(襄國)을 진수했다. 조익(曹嶷)이 제 땅 세 군을 함락하고 광고(廣固)를 차지했다.
甲戌 晉以琅玡王睿為大司馬,苟組為司空,劉琨為大將軍,封涼州張軌為太尉。西平郡王軌卒,子寔繼,稱西河王,國曰涼,元曰永興,城姑臧,是謂前涼。漢劉聰立三皇后,改元建元。劉曜圍晉長安,石勒圍晉幽州。乙亥 晉進左丞相琅蚜王睿都督中外諸軍事,右丞相南陽王保為相國,司空苟組為太尉,大將軍劉琨為司空。陶侃平江表,獲杜弢。漢劉聰立七皇后,授石勒專命俾徵,伐晉。勒拔晉濮陽。
갑술년(甲戌年, 314년), 진이 낭야왕 사마예를 대사마, 순조(荀組)(저본은 구조(苟組))를 사공, 유곤을 대장군으로 삼고, 양주자사 장궤를 태위로 봉했다. 서평군왕(西平郡王) 장궤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장식(張寔)이 뒤를 이어 서하왕(西河王)을 칭하고 국호를 「량(涼)」, 연호를 「영흥(永興)」이라 하고, 고장(姑臧)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으니――이가 전량이다. 한의 임금 유총이 한 번에 세 황후를 나란히 세우고 원년을 고쳐 「건원(建元)」이라 했다. 유요가 장안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석륵이 유주를 포위하여 공격했다. 을해년(乙亥年, 315년), 진이 좌승상 낭야왕 사마예를 진봉하여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저본은 「낭야」를 낭아(琅蚜)로 그침)로 하고, 우승상 남양왕 사마보를 상국, 사공 순조를 태위, 대장군 유곤을 사공으로 했다. 도간(陶侃)이 강남을 평정하여 유민수(流民帥) 두도(杜弢)를 사로잡았다. 한의 임금 유총이 또 일곱 황후를 나란히 세우고, 아울러 석륵에게 전정(專征)의 권한을 주어 진을 치게 하니, 석륵이 복양(濮陽)을 함락했다.
丙子 晉長安陷於寇,帝出降於豆田中。漢劉曜拔晉長安,俘其帝於平陽,改元麟嘉。石勒拔晉太原,劉琨走幽州,依段匹□。丁丑 晉帝在平陽。琅玡王睿渡江,稱晉王於建康,元曰建武。以西陽王羕為太尉,王敦為大將軍,王導都督中外。帝死於平陽。戊寅 晉王睿稱帝於建康,改元太興,以子紹為太子,是謂東晉元帝。劉琨為段匹所害。王敦稱牧荊州,王導開府建康。漢劉聰卒,子粲繼,改元漢昌。將靳準殺粲代立,相國劉曜自長安入,至赤壁,稱帝,改元光初,加大將軍勒九錫,封趙國公。國人誅靳准以迎曜。
병자년(丙子年, 316년), 장안이 포위되어 양식이 다해 함락되니, 진민제가 성 밖 콩밭에서 나가 항복했다. 한의 장수 유요가 장안을 함락하고 민제를 평양으로 사로잡아 가고, 한은 원년을 고쳐 「린가(麟嘉)」라 하니――서진이 이로써 멸망했다. 석륵이 태원을 함락하고, 유곤은 북으로 유주로 달아나 선비(鮮卑) 장령 단필제(段匹磾)(저본은 이 글자가 궐함)에게 의부했다. 정축년(丁丑年, 317년), 민제가 여전히 평양에서 욕을 받고 있었다. 낭야왕 사마예가 강을 건너 건강에서 진왕을 칭하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하며, 서양왕(西陽王) 사마양(司馬羕)을 태위, 왕돈(王敦)을 대장군, 왕도(王導)를 도독중외(都督中外)로 삼았으니――이는 동진 개국의 장본이다. 민제는 그 뒤 평양에서 해를 당했다. 무인년(戊寅年, 318년), 사마예가 건강에서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태흥(太興)」이라 하며, 아들 사마소(司馬紹)를 세워 태자로 삼았으니 곧 동진 원제(元帝)이다. 유곤이 단필제에게 해를 당했다. 왕돈이 나가 형주목이 되고 왕도가 건강에서 부(府)를 열었다――이른바 「왕과 마가 천하를 함께한다」는 격국이 이로부터 이루어졌다. 한의 임금 유총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유찬이 뒤를 이어 원년을 고쳐 「한창(漢昌)」이라 했다. 대장(大將) 근준(靳准)이 유찬을 시하고 자립했다. 상국 유요가 장안에서 동진하여 적벽(赤壁)에 이르러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광초(光初)」라 하며, 석륵에게 구석을 더하고 조국공(趙國公)에 봉했다. 한나라 사람들이 근준을 죽이고 유요를 맞아 세웠다.
己卯 晉南陽王保保祁山,稱晉王。漢劉曜還長安,改國曰趙,是謂前趙。殺石勒使者王循。石勒稱王襄國,國曰趙,元曰趙,是謂後趙。以張賓為之相,號大執法。以弟虎為之將,號元輔。庚辰 晉南陽王保走桑城,死。涼亂,殺張寔,寔弟茂代領其眾。辛巳 晉王導為司空,錄尚書事。幽州陷,段匹沒於石勒。鮮卑慕容廆受晉持節,都督遼東、遼西。
기묘년(己卯年, 319년), 진의 남양왕 사마보가 물러가 기산을 지키고 스스로 진왕을 칭했다. 유요가 장안으로 돌아와 국호를 「한」에서 「조(趙)」로 고쳤으니――사에 전조(前趙)라 이른다. 그가 석륵의 사신 왕순(王循)을 죽이니 두 집이 마침내 사적이 되었다. 석륵이 곧 양국에서 조왕을 칭하고 국호도 「조」, 연호를 「조」라 했으니――사에 후조(後趙)라 이른다. 모사 장빈(張賓)을 재상으로 삼아 호를 대집법(大執法)이라 하고, 그 아우 석호(石虎)를 대장으로 삼아 호를 원보(元輔)라 했다. 경진년(庚辰年, 320년), 남양왕 사마보가 상성(桑城)으로 달아나 죽었다. 전량이 내란하여 장식이 살해되고 그 아우 장무(張茂)가 부중을 이어 통솔했다. 신사년(辛巳年, 321년), 동진이 왕도를 사공·록상서사로 삼았다. 유주가 함락되고 단필제가 석륵에게 사로잡혔다. 선비의 수령 모용외(慕容廆)가 진나라의 지절(持節)의 명을 받아 요동·요서를 도독했다――모용씨가 이로부터 정식으로 중원의 정국에 들어갔다.
壬午 晉改元永昌。大將軍王導以武昌叛,破石頭,自為丞相,都督中外。太保西陽王羕進位太宰,加司空。王導進位尚書令。石虎寇太山。梁碩以淮陰叛。帝憂憤死,皇太子紹嗣位,是謂明帝。石勒拔劉曜河南。癸未 晉改元太寧。王敦假黃鉞。劉曜、石勒皆入寇。趙劉曜拔晉陳安,收隴城、陝西城及上邽;趙石勒滅晉曹嶷於廣固。涼張茂稱藩於前趙。
임오년(壬午年, 322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영창(永昌)」이라 했다. 대장군 왕돈(저본은 여기서 잘못 왕도로 씀)이 무창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고, 석두성(石頭城)을 격파하여 스스로 승상·도독중외로 임했다. 태보 서양왕 사마양이 지위를 올려 태재에 사공을 더하고, 왕도가 지위를 올려 상서령(尚書令)이 되었다. 석호가 태산을 침범하고, 양석(梁碩)이 회음(淮陰)에 의거하여 반역했다. 진원제가 우분하여 죽고 황태자 사마소가 뒤를 이었으니 곧 진명제(晉明帝)이다. 석륵이 유요의 하남의 땅을 함락했다. 계미년(癸未年, 323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태녕(太寧)」이라 하고, 왕돈이 황월을 받아 권세가 더욱 성해졌다. 유요·석륵이 모두 군사를 내어 남침했다. 전조의 유요가 진의 장수 진안(陳安)을 격파하고 농성(隴城)·섬서성(陝西城)과 상규를 거두어 들였다. 후조의 석륵이 광고에서 진에 친한 조익을 소멸했다. 전량의 장무가 돌아 전조에 번을 칭하여 스스로를 보존했다.
甲申 晉王敦寇江寧,帝御六軍,敗敦于越城。敦死於蕪湖。王導為太保。蜀李雄以兄之子班為太子。涼張茂卒,兄子駿立,改元太光。乙酉 晉以子衍為皇太子。石勒入寇。以陶侃為徵西大將軍,都督荊、湘、梁、雍。明帝終,太子衍嗣位。是謂成帝。太后庾氏稱制,司徒王導錄尚書事,同中書令庾亮輔政。遼西亂,段遼殺其主自立。趙石勒拔晉荊、兗、豫三州,及劉曜新安、許昌。
갑신년(甲申年, 324년), 왕돈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강녕(江寧)을 핍박하니, 진명제가 친히 육군을 통솔하여 월성(越城)에서 왕돈의 군사를 패하고, 왕돈이 우병하여 무호(蕪湖)에서 죽으니 반란이 평식되었다. 왕도가 태보로 올랐다. 성한의 이웅이 형의 아들 이반(李班)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전량의 장무가 세상을 떠나고 그 형의 아들 장준(張駿)이 뒤를 이어 원년을 고쳐 「태원(太元)」(저본은 태광(太光))이라 했다. 을유년(乙酉年, 325년), 동진이 황자 사마연(司馬衍)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석륵이 남침하니 진이 도간을 정서대장군으로 삼아 형·상·양·옹 네 주를 도독했다. 명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사마연이 뒤를 이었으니 곧 진성제(晉成帝)이며, 어려서 우태후(庾太后)가 조정에 임하여 칭제하고, 사도 왕도가 록상서사가 되어 중서령(中書令) 우량(庾亮)과 함께 정사를 보좌했다. 요서가 내란하여 단료(段遼)가 그 주를 죽이고 자립했다. 후조의 석륵이 동진의 형·연·예 세 주를 함락하고, 또 전조 유요의 신안·허창을 빼앗았다.
丙戌 晉改元咸和,進王導大司馬,假黃鉞,都督中外軍事。蜀李雄攻晉涪城,趙石勒攻晉汝南。丁亥 晉豫州祖約、歷陽蘇峻、彭城王雄、章武王休連兵犯建業,司馬流拒戰,不克,死於慈湖。戊子 晉蘇峻敗王師於西陵,入宮,稱驃騎將軍。錄尚書事,徙帝於石頭。虞潭、庾冰、王舒稱義三吳,會征西將軍陶侃、平南將軍溫嶠、平北將軍魏該圍峻於白石,滅之。峻弟逸代總其眾。韓晃寇宣城,祖約奔石勒。大敗劉曜於洛陽,獲之,遂滅前趙。以徐光為中書令。
병술년(丙戌年, 326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함화(咸和)」라 하고, 왕도를 진하여 대사마로 하고 황월을 받아 중외의 군사를 도독했다. 성한의 이웅이 진의 부성을 진공하고, 후조의 석륵이 진의 여남을 진공했다. 정해년(丁亥年, 327년), 예주자사 조약(祖約)·역양내사(歷陽內史) 소준(蘇峻)이 팽성왕(彭城王) 사마웅(司馬雄)·장무왕(章武王) 사마휴(司馬休)와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켜 건업을 진범하니, 진의 장수 사마류(司馬流)가 맞아 싸우되 이롭지 못하여 자호(慈湖)에서 전사했다. 무자년(戊子年, 328년), 소준이 서릉에서 진군을 패하고 궁성에 쳐들어가 스스로 표기장군·록상서사를 칭하고, 성제를 석두성에 협지했다. 우담(虞潭)·우빙(庾氷)·왕서(王舒)가 삼오의 땅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정서장군 도간·평남장군(平南將軍) 온교(溫嶠)·평북장군(平北將軍) 위해(魏該)와 함께 소준을 백석(白石)에 합포하여 이를 소멸했다. 소준의 아우 소일(蘇逸)이 남은 무리를 이어 통솔하고, 부장 한황(韓晃)이 선성(宣城)을 침범하며, 조약은 북으로 달아나 석륵에게 투신했다. 같은 해 후조가 낙양에서 전조의 유요를 크게 패하게 하고 이를 생금하니 전조가 마침내 망하고, 석륵이 서광(徐光)을 중서령으로 삼았다.
己丑 晉蘇逸拔石頭,帝野次。滕含敗逸於石頭。逸退保吳興。王允之敗逸於溧陽,滅之。趙(闕)安。石虎破上邽,殺劉熙、劉胤三千人。庚寅 晉陸玩、孔愉為左右僕射。起新宮於苑,陶侃擒郭默於潯陽。蜀李雄攻晉巴東。涼張駿稱藩於石勒。趙石勒稱帝,自襄國徙都鄴,改元建平。辛卯 晉以陸玩為尚書令。
기축년(己丑年, 329년), 소일이 석두성을 함락하고 진성제가 한때 밖에 노숙했다. 진의 장수 등함(滕含)이 석두성에서 소일을 패하고, 소일이 물러가 오흥(吳興)을 지키니 왕윤지(王允之)가 또 율양(溧陽)에서 그를 섬멸했다. 후조의 한 구절은 저본에 궐문이 있어 「조(趙)(궐)안(安)」 세 글자만 남았는데, 기록한 것은 마땅히 석호의 서정(西征)의 싸움이리――석호가 상규를 격파하고 전조의 유희(劉熙)·유윤(劉胤) 등 삼천여 인을 죽이니 전조의 남은 부분이 여기서 쓸려 나갔다. 경인년(庚寅年, 330년), 동진이 육완(陸玩)·공유(孔愉)를 좌우복야로 삼고 원중(苑中)에 신궁을 건축했다. 도간이 심양(潯陽)에서 반장(叛將) 곽묵(郭默)을 사로잡았다. 성한의 이웅이 진의 파동(巴東)을 진공했다. 전량의 장준이 돌아 석륵에게 번을 칭했다. 후조의 석륵이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고 도읍을 양국에서 업으로 옮기며 원년을 고쳐 「건평(建平)」이라 했다. 신묘년(辛卯年, 331년), 동진이 육완을 상서령으로 삼았다.
壬辰 晉徙居新宮,進太尉陶侃大將軍。趙石勒卒,子弘繼,改元延熙,加石虎九錫,專政,稱丞相魏(王),殺中書令徐光及右長史程遐。癸巳 晉遼東公慕容廆卒,子皝繼。蜀李雄卒,子班繼,叔父壽專政。趙亂,石弘出奔譙城。石朗稱兵洛陽,石生抗軍長安,石虎咸滅之。
임진년(壬辰年, 332년), 진성제가 신궁으로 옮겨 들고, 태위 도간을 진하여 대장군으로 삼았다. 후조의 석륵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석홍(石弘)이 뒤를 이어 원년을 고쳐 「연희(延熙)」라 했다. 석호는 구석을 가사받고 조정을 독차지하여 스스로 승상 위왕(魏王)을 칭하고(저본의 「왕」 자는 교자(校者)가 보충한 것), 아울러 중서령 서광과 우장사(右長史) 정하(程遐)라는 두 고명(顧命)의 신하를 죽였다. 계사년(癸巳年, 333년), 동진이 봉한 요동공(遼東公) 모용외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뒤를 이었다. 성한의 이웅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이반이 뒤를 이으며 숙부 이수(李壽)가 정사를 독차지했다. 후조가 크게 어지러워 석홍이 초성(譙城)으로 달아났다. 석랑(石朗)이 낙양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석생(石生)이 장안에서 군사를 가지고 명에 항했으나, 모두 석호에게 차례로 소멸되었다.
경세지축(經世之丑) 二千二百四十六
甲午 東晉成帝九年。蜀李班為庶兄越所殺,立雄子期,改元玉恆,越專政。涼張駿受晉大將軍命。乙未 晉改元咸康。石虎入寇,假大司馬王導黃鉞,出兵戍慈湖、牛渚、蕪湖。趙亂,石虎殺弘代立,稱攝天王,改元建武。丙申。丁酉 鮮卑慕容皝稱王遼東,趙石虎稱趙天王。
갑오년(甲午年)은 동진 성제 재위 9년, 334년이다. 성한의 이반이 서형(庶兄) 이월(李越)에게 살해되고, 이웅의 아들 이기(李期)를 세워 원년을 고쳐 「옥항(玉恒)」이라 하며 이월이 권력을 독차지했다. 전량의 장준이 동진이 수여한 대장군의 직을 받았다. 을미년(乙未年, 335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함강(咸康)」이라 했다. 석호가 남침하니 조정이 대사마 왕도에게 황월을 수여하고 군사를 내어 자호·우저(牛渚)·무호 세 곳의 강방 요지를 둔수하게 했다. 후조가 내란하여 석호가 석홍을 죽이고 자립하여 섭정천왕(攝政天王)을 칭하고 원년을 고쳐 「건무(建武)」라 했다. 병신년(丙申年, 336년)은 기록할 것이 없었다. 정유년(丁酉年, 337년), 선비의 모용황이 요동에서 연왕(燕王)을 칭하여 전연(前燕)이 이로부터 나라를 세웠다. 후조의 석호가 대조천왕(大趙天王)으로 개칭했다.
戊戌 單于冒頓拓跋什翼犍稱王定襄,國曰代,元曰建國。蜀亂,李壽自漢中入,殺期代立,改國為漢,元曰漢興。慕容皝攻後趙。己亥 晉王導卒。伐蜀。庚子 晉陸玩為司空。遼東慕容皝獻伐石虎之捷。漢李壽拔晉丹州。辛丑 晉慕容皝求為假燕王,徙居和龍。
무술년(戊戌年, 338년), 선비 탁발부(拓跋部)의 수령 탁발식익건(拓跋什翼犍)이 정양(定襄)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대(代)」, 연호를 「건국(建國)」이라 했으니――이가 훗날 북위(北魏)의 전신이다(저본은 흉노 묵돈선우(冒頓單于)에 계(系)하는데, 당시 북족의 원류에 대한 옛 설이다). 성한이 내란하여 이수가 한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에 들어가 이기를 죽이고 자립하고, 국호를 「한」으로 고치며 원년을 고쳐 「한흥(漢興)」이라 했다. 모용황이 군사를 내어 후조를 진공했다. 기해년(己亥年, 339년), 동진의 명재상 왕도가 세상을 떠났다. 진이 군사를 내어 촉을 쳤다. 경자년(庚子年, 340년), 동진이 육완을 사공으로 삼았다. 요동의 모용황이 진 조정에 석호를 토벌한 첩보를 바쳤다. 이수가 진의 단주(丹州)를 함락했다. 신축년(辛丑年, 341년), 모용황이 진 조정에 정식으로 연왕의 봉호를 수여하기를 청하고 치소를 화룡(和龍)으로 옮겼다.
壬寅 晉成帝崩,母弟琅玡王嶽立,是謂康帝。封成帝二子丕為琅玡王,弈為東海王。中書監庾冰、中書令何充參錄尚書事,諸葛恢輔政。漢李壽卒,子勢繼,改元太和。癸卯 晉改元建元。甲辰 晉康帝崩,太子聃繼,是謂穆帝。太后稱制。趙石虎伐涼,不利;伐燕,有功。乙巳 晉改元永和。會稽王昱為撫軍大將軍,錄尚書六條事,專政。
임인년(壬寅年, 342년), 진성제가 세상을 떠나고 동모제(同母弟) 낭야왕 사마악(司馬岳)이 뒤를 이었으니 곧 진강제(晉康帝)이며, 성제의 두 아들 사마비(司馬丕)를 낭야왕, 사마혁(司馬奕)을 동해왕으로 봉했다. 중서감(中書監) 우빙·중서령 하충(何充)이 록상서사에 참여하고 제갈회(諸葛恢)가 정사를 보좌했다. 성한의 이수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이세(李勢)가 뒤를 이어 원년을 고쳐 「태화(太和)」라 했다. 계묘년(癸卯年, 343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건원(建元)」이라 했다. 갑진년(甲辰年, 344년), 강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사마담(司馬聃)이 뒤를 이었으니 곧 진목제(晉穆帝)로 나이 겨우 두 살이어서 저태후(褚太后)가 칭제했다. 후조의 석호가 서쪽으로 전량을 쳐서 실리를 잃고, 북으로 전연을 쳐서는 얻는 것이 있었다. 을사년(乙巳年, 345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영화(永和)」라 하고,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이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록상서육조사(錄尚書六條事)가 되어 조정을 맡기 시작했다.
丙午 晉桓溫伐蜀。漢李勢平李弈,改元嘉寧。涼張駿卒,子重華繼,改元永樂。趙石虎攻涼金城。丁未 晉桓溫滅蜀,徙李勢於建康。蜀復亂,範賁稱帝成都。涼張重華敗石虎於枹罕。戊申 晉桓溫為徵西大將軍,入長安,至於灞上。遼東慕容皝卒,子雋繼。趙石虎攻晉竟陵。
병오년(丙午年, 346년), 동진의 형주자사 환온(桓溫)이 군사를 내어 촉을 쳤다. 성한의 이세가 이혁(李弈)의 난을 평정하고 원년을 고쳐 「가녕(嘉寧)」이라 했다. 전량의 장준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장중화(張重華)가 뒤를 이어 원년을 고쳐 「영락(永樂)」이라 했다. 후조의 석호가 전량의 금성(金城)을 진공했다. 정미년(丁未年, 347년), 환온이 성한을 멸하고 이세를 건강으로 옮기니, 환온의 성위가 이로써 크게 떨쳤다. 촉 땅이 다시 어지러워 범분(范賁)이 성도에서 황제를 칭했다. 전량의 장중화가 부한(枹罕)에서 석호의 군사를 격파했다. 무신년(戊申年, 348년), 환온이 정서대장군으로 오르고 군사를 거느려 관에 들어가 장안 근교의 파상(灞上)에 이르렀다(살피건대 이 싸움은 실은 수년 뒤의 일로, 소옹이 이 해에 매었다). 요동의 모용황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모용준(慕容儁)이 뒤를 이었다. 후조의 석호가 진의 경릉(竟陵)을 진공했다.
己酉 晉平蜀亂。鮮卑慕容雋稱王遼東,國曰燕,元曰燕元,是謂前燕。趙石虎稱帝,改元太寧。虎卒,子世繼,張豺為相,專制。內難作,石遵自關右入,殺世及張豺,代立。石冰自薊門入,殺遵不克。石閔殺遵,立石鑑,改元青龍,閔稱大將軍,專政。苻洪稱兵廣川。
기유년(己酉年, 349년), 동진이 촉 땅의 남은 난을 평정했다. 선비의 모용준이 요동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연(燕)」, 연호를 「연원(燕元)」이라 했으니――이가 전연이다. 후조의 석호가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태녕(太寧)」이라 했으나 곧 세상을 떠나고, 어린 아들 석세(石世)가 뒤를 이으며 장채(張豺)가 재상이 되어 대권을 독차지했다. 석씨 여러 아들의 내분이 잇달아 터졌다――석준(石遵)이 관우(關右)에서 업에 들어가 석세와 장채를 죽이고 자립했다. 석빙이 계문(薊門)에서 업에 들어가 석준을 모살하려다 이루지 못했다. 한인 출신의 양손(養孫) 석민(石閔)――곧 염민(冉閔)――이 석준을 죽이고 석감(石鑑)을 세워 원년을 고쳐 「청룡(青龍)」이라 하고, 스스로 대장군을 칭하여 조정을 전단했다. 저수 부홍(苻洪)이 광천(廣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전진(前秦)의 세가 이로부터 싹텄다.
庚戌 趙石鑑殺大將軍閔及李農,不克。閔殺鑑,代立,複姓冉氏,改國曰魏,元曰永興,大滅石氏宗室。鑑弟祗稱帝襄國,以將劉顯南攻冉氏,不克,殺祗以降。閔破襄國,誅顯,滅其族。將苻健自枋頭入關,逐杜洪於長安,據之。將魏統以兗州,冉遇以豫州,樂弘以荊州,鄭繫以洛州,入於晉。劉淮以幽州入於燕。燕南略地至幽、冀。
경술년(庚戌年, 350년), 후조의 석감이 대장군 석민과 이농(李農)을 주살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석민이 도리어 석감을 죽이고 자립하여 본성 염(冉)으로 회복하고, 국호를 「위」, 연호를 「영흥(永興)」으로 고치며, 아울러 석씨 종실을 크게 도륙했다――사에 염위(冉魏)라 이른다. 석감의 아우 석지(石祗)가 양국에서 황제를 칭하고 부장 유현(劉顯)을 보내 남하하여 염위를 치게 했으나 패하니, 유현이 곧 석지를 죽이고 항복했다. 염민이 나아가 양국을 격파하고 유현을 주살하여 그 족을 멸하니――후조가 여기서 멸망했다. 저수 부건(苻健)이 방두(枋頭)에서 관에 들어가 장안을 차지한 두홍(杜洪)을 몰아내고 관중을 차지했다. 후조의 옛 장수 위통(魏統)이 연주로, 염우(冉遇)가 예주로, 낙홍(樂弘)이 형주로, 정계(鄭系)가 낙주로 동진에 귀부하고, 유준(劉准)(저본은 유회(劉淮))이 유주로 전연에 귀부했다. 전연이 기세를 타 남하하여 유주·기주의 땅을 함락했다.
辛亥 趙將周成以廩丘,高昌以野王,樂立以許昌,李歷以衛州,請附於晉。劉啟、姚弋仲亦奔於晉。魏冉閔攻燕不利,死,國亡。石虎將苻健稱天王於長安,國曰秦,元曰皇始,是謂前秦,敗晉軍於五丈原。燕慕容雋南伐魏,滅冉閔於昌城。壬子 晉武陵王晞為太宰,會稽王昱為司徒,大將軍桓溫為太尉。魏冉智以鄴降燕,慕容雋稱帝,自和龍徙居中山,改元天璽。秦苻健稱帝長安。
신해년(辛亥年, 351년), 후조의 옛 장수 주성(周成)이 림구(廩丘)에, 고창(高昌)이 야왕(野王)에, 낙립(樂立)이 허창에, 이역(李曆)이 위주(衛州)에 의거하여 다투어 동진에 귀부하기를 청하고, 유계(劉啓)·요익중(姚弋仲)도 진나라에 투신했다――하북이 한때 군룡무수(群龍無首)가 되었다. 염위의 염민이 전연을 진공하다 실리를 잃고 패하여 죽으니 염위가 나라를 잃었다. 석호의 옛 장수 부건이 장안에서 천왕을 칭하고 국호를 「진(秦)」, 연호를 「황시(皇始)」라 했으니――이가 전진이며, 아울러 오장원에서 진군을 격파했다. 전연의 모용준이 남으로 염위를 쳐서 창성(昌城)에서 염민의 세력을 소멸했다. 임자년(壬子年, 352년), 동진이 무릉왕(武陵王) 사마희(司馬晞)를 태재, 회계왕 사마욱을 사도, 대장군 환온을 태위로 삼았다. 염위의 태자 염지(冉智)가 업성으로 연에 항복하니, 모용준이 마침내 황제를 칭하고 도읍을 화룡에서 중산(中山)으로 옮기며 원년을 고쳐 「천새(天璽)」라 했다. 전진의 부건도 장안에서 황제를 칭했다.
癸丑 涼秦相攻。涼張重華卒,子曜靈繼,伯父祚殺曜靈代立,改元和平。甲寅 晉太尉桓溫伐秦,至灞上。秦苻健敗晉軍於白鹿原,又敗之於子午谷。乙卯 晉將段龕敗燕軍於狼山。右軍王羲之辭官歸。涼宋混、張瓘殺張祚,立曜靈弟玄靚,改元大始。燕南攻晉,不利。秦苻健卒,子生繼。
계축년(癸丑年, 353년), 전량과 전진이 서로 공벌했다. 전량의 장중화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장요령(張曜靈)이 뒤를 이었으나, 백부 장조(張祚)가 요령을 죽이고 자립하여 원년을 고쳐 「화평(和平)」이라 했다. 갑인년(甲寅年, 354년), 동진의 태위 환온이 북으로 전진을 쳐서 장안 근교의 파상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양식이 다해 물러났다. 전진의 부건이 백록원(白鹿原)에서 진군을 패하고 또 자오곡(子午谷)에서 진군을 다시 패했다. 을묘년(乙卯年, 355년), 진의 장수 단간(段龕)이 낭산(狼山)에서 연군을 격파했다.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王羲之)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은거했다. 전량의 송혼(宋混)·장관(張瓘)이 장조를 죽이고 장요령의 아우 장현정(張玄靚)을 세워 원년을 고쳐 「태시(太始)」라 했다. 전연이 남으로 동진을 쳐서 실리를 잃었다. 전진의 부건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부생(苻生)이 뒤를 이었다.
丙辰 晉桓溫敗姚襄軍於伊水,遂復洛陽。秦苻生改元壽光。丁巳 晉改元昇平,帝加元服。王彪之為左僕射。燕改元光壽,自中山徙都鄴。秦苻生虐用其人,雄子堅殺生代立,去帝號,稱天王,改元永興,以王猛、呂婆、樓強、汪梁、平老為之輔。戊午 晉將馮鴦以眾入於燕。燕拔晉上黨。
병진년(丙辰年, 356년), 환온이 이수(伊水)에서 강수(羌帥) 요양(姚襄)을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했다. 전진의 부생이 원년을 고쳐 「수광(壽光)」이라 했다. 정사년(丁巳年, 357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승평(升平)」이라 하고 목제가 관례를 행하여 친정하며 왕표지(王彪之)가 좌복야가 되었다. 전연이 원년을 고쳐 「광수(光壽)」라 하고 도읍을 중산에서 업으로 옮겼다. 전진의 부생이 잔학하여 백성을 학대하니, 부웅(苻雄)의 아들 부견(苻堅)이 부생을 죽이고 자립하여 제호를 버리고 다만 천왕을 칭하며 원년을 고쳐 「영흥(永興)」이라 하고, 왕맹(王猛) 및 여파루(呂婆樓)·강왕(強汪)·양평노(梁平老) 등을 임용하여 보좌로 삼았다(저본은 「여파·루강·왕량·평노」로 끊는데 인명에 잘못이 있다). 무오년(戊午年, 358년), 진의 장수 풍앙(馮鸯)이 부하를 거느리고 전연에 투부했다. 전연이 진의 상당을 함락했다.
己未 晉伐燕不利,燕敗晉於東阿。秦改元甘露,以王猛為中書令,尹京兆。庚申 晉仇池公楊駿卒,子世繼。燕慕容雋卒,子繼,改元建熙,慕容恪為太宰,專政。慕容評為太傅。慕容根為太師,慕容垂為河南大都督。根作逆伏誅。辛酉 晉穆帝終,立成帝子琅玡王丕,是謂哀帝。壬戌 晉改元隆和。燕師攻晉洛陽。癸亥 晉改元興寧。桓溫為大司馬,假黃鉞,都督中外軍事,北伐。涼張天錫殺玄靚代立,改元太清。燕將慕容評攻晉許昌。
기미년(己未年, 359년), 동진이 연을 쳐서 실리를 잃고 연군이 동아(東阿)에서 진군을 격파했다. 전진이 원년을 고쳐 「감로(甘露)」라 하고 왕맹을 중서령 겸 경조윤(京兆尹)으로 삼으니――진의 정사가 이로부터 점차 궤도에 올랐다. 경신년(庚申年, 360년), 동진이 봉한 구지공(仇池公) 양준(楊駿)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양세(楊世)가 뒤를 이었다. 전연의 모용준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모용위(慕容暐)가 뒤를 이었는데(저본은 위(暐) 자를 빠뜨림), 원년을 고쳐 「건희(建熙)」라 하고 모용각(慕容恪)을 태재로 하여 정사를 주관하게 하고 모용평(慕容評)을 태부, 모용근(慕容根)을 태사, 모용수(慕容垂)를 하남대도독(河南大都督)으로 삼았다. 모용근이 모역하여 복주했다. 신유년(辛酉年, 361년), 진목제가 세상을 떠나고 성제의 아들 낭야왕 사마비를 세웠으니 곧 진애제(晉哀帝)이다. 임술년(壬戌年, 362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융화(隆和)」라 하고 연군이 진의 낙양을 진공했다. 계해년(癸亥年, 363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흥녕(興寧)」이라 하고 환온이 대사마가 되어 황월을 받아 중외의 군사를 도독하고 군사를 내어 북벌했다. 전량의 장천석(張天錫)이 장현정을 죽이고 자립하여 원년을 고쳐 「태청(太清)」이라 했다. 연의 장수 모용평이 진의 허창을 진공했다.
경세지인(經世之寅) 二千二百四十七
甲子 東晉哀帝三年,餌丹,有疾,太后稱制。燕、秦入寇洛陽。乙丑 晉哀帝終於餌丹,母弟琅玡王弈立。洛陽陷於燕。司馬勳以梁州叛,稱成都王。秦改元建元。匈奴左右賢王以朔方叛,平之。丙寅 晉改元太和。會稽王昱為丞相。燕、秦入寇。涼張天錫受晉命,大將軍都督隴右。燕拔晉魯郡。秦拔晉南鄉。
갑자년(甲子年)은 동진 애제 재위 3년, 364년이다. 애제가 단약을 복식하여 중독되어 병이 들자 저태후가 다시 칭제했다. 전연·전진이 동시에 낙양을 침입했다. 을축년(乙丑年, 365년), 애제가 마침내 단약을 복식한 것으로 죽고 동모제 낭야왕 사마혁이 뒤를 이었다. 낙양이 전연에 함락되었다. 양주자사 사마훈(司馬勳)이 반역하여 스스로 성도왕을 칭했다. 전진이 원년을 고쳐 「건원(建元)」이라 했다. 흉노의 좌우현왕(左右賢王)이 삭방(朔方)에 의거하여 진에 반역했으나 곧 평정되었다. 병인년(丙寅年, 366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태화(太和)」라 하고 회계왕 사마욱이 승상이 되었다. 연·진이 계속 침입했다. 전량의 장천석이 진나라의 임명을 받아 대장군·도독농우(都督隴右)가 되었다. 전연이 진의 노군(魯郡)을 함락하고 전진이 진의 남향(南鄉)을 함락했다.
丁卯 燕攻晉竟陵,秦攻晉涼州。戊辰 秦苻雙以上邽、苻柳以蒲坂叛,王猛悉平之。己巳 晉大司馬桓溫北伐燕,不利,歸罪袁真。袁真以壽陽入於燕。燕大將慕容垂敗晉師於枋頭,以眾降秦,評害功故也。秦救燕有功,取燕之金墉,責無信也。
정묘년(丁卯年, 367년), 전연이 진의 경릉을 진공하고 전진이 진의 양주를 진공했다. 무진년(戊辰年, 368년), 전진의 종실 부쌍(苻双)이 상규에, 부류(苻柳)가 포판(蒲坂)에 의거하여 반역했으나 모두 왕맹에게 평정되었다. 기사년(己巳年, 369년), 동진의 대사마 환온이 북으로 전연을 쳐서 실리를 잃고 패전의 책임을 부장 원진(袁真)에게 떠넘기니, 원진이 분을 품고 수양(壽陽)으로 연에 항복했다. 연의 장수 모용수가 방두에서 진군을 크게 패했으나 태부 모용평이 공을 시기하여 해치려 하므로 오직 부하를 거느리고 전진에 투신할 뿐이었다. 전진이 군사를 내어 연을 구하여 공이 있었으나 일이 끝난 뒤 연의 금용성을 빼앗았다――그 이유는 연이 앞서 땅을 할여하겠다는 허락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庚午 晉壽陽袁真卒,子瑾繼。桓溫敗瑾於壽陽。廣漢及成都寇亂。王猛滅燕於鄴,徙慕容於長安,收郡五十七。猛留鎮鄴。辛未 晉桓溫平壽陽,獲袁瑾以歸,廢其君弈為海西王,立會稽王昱,改元咸安,是謂文帝,溫稱丞相,鎮姑熟,專制,殺太宰武陵王晞、新蔡王晃,仍降海西王為公,及害其二子與母。
경오년(庚午年, 370년), 수양에 의거한 원진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원근(袁瑾)이 직을 이었는데 환온이 수양에서 원근을 격파했다. 광한·성도 일대에 민변이 일어났다. 전진의 왕맹이 업성에서 전연을 멸하고 연의 임금 모용위를 장안으로 옮겨 군현 쉰일곱을 거두니――왕맹이 남아 업성을 진수하고 북방의 대부분이 진에 돌아갔다. 신미년(辛未年, 371년), 환온이 수양을 평정하고 원근을 사로잡아 조정으로 돌아와 곧 진제 사마혁을 폐하여 해서왕(海西王)으로 하고 회계왕 사마욱을 세워 원년을 고쳐 「함안(咸安)」이라 하니――곧 진간문제(晉簡文帝)이다. 환온이 스스로 승상을 칭하고 나가 고숙(姑熟)을 진수하여 조정을 멀리 제어하고, 태재 무릉왕 사마희와 신채왕(新蔡王) 사마황(司馬晃)을 죽이고, 또 해서왕을 낮추어 해서공으로 하며 그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를 해쳤다.
壬申 晉命百濟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守。庾希以海陵叛,入於京口。文帝昱終,子曜嗣,是謂武帝。桓溫還姑熟。秦王猛平慕容桓於遼東,滅仇池公楊纂於秦州。癸酉 晉改元寧康。大司馬桓溫卒,太后稱制,王彪之為尚書令,謝安為尚書僕射,專制。張天錫貢方物。秦拔晉成都及梓潼。
임신년(壬申年, 372년), 동진이 백제왕(百濟王) 여구(余句)를 임명하여 진동장군·령낙랑태수(領樂浪太守)로 삼았다. 우희(庾希)가 해릉(海陵)에 의거하여 반역하고 경구(京口)에 쳐들어갔다. 간문제 사마욱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사마요(司馬曜)가 뒤를 이었으니 곧 진효무제(晉孝武帝)이다. 환온이 고숙으로 물러났다. 전진의 왕맹이 요동에서 연의 장수 모용환(慕容桓)을 평정하고 또 진주에서 구지공 양찬(楊纂)을 멸했다. 계유년(癸酉年, 373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영강(寧康)」이라 했다. 대사마 환온이 세상을 떠나 찬위의 위험이 마침내 풀렸다. 숭덕태후(崇德太后)가 칭제하고 왕표지가 상서령, 사안(謝安)이 상서복야가 되어 함께 조정을 잡았다. 전량의 장천석이 진에 방물(方物)을 조공했다. 전진이 진의 성도와 재동을 함락했다.
甲戌 晉桓石破秦軍於墊江。張育稱王於蜀,秦復平之。乙亥 秦大將軍王猛卒。丙子 晉改元太元,帝加元服。皇太后委政桓沖,桓豁為將軍,謝安為尚書鑑,錄尚書事。秦滅前涼,徙張天錫於姑臧,又平朔方,獲拓跋什翼犍,徙之長安。丁丑 晉秦二國抗衡天下。
갑술년(甲戌年, 374년), 진의 장수 환석건(桓石虔)이 전강(墊江)에서 진군을 격파했다. 장육(張育)이 촉 땅에서 왕을 칭했으나 또 전진에 평정되었다. 을해년(乙亥年, 375년), 전진의 대장군·승상 왕맹이 세상을 떠나니 부견이 이로부터 주춧돌을 잃었다. 병자년(丙子年, 376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태원(太元)」이라 하고 효무제가 관례를 행하여 친정했다. 숭덕태후가 정사를 돌려주고, 환충(桓沖)으로 군사를 주관하게 하고 환곽(桓豁)을 장군, 사안을 상서감(尚書監)·록상서사로 삼았다. 전진이 전량을 멸하고 장천석을 고장에서 옮겨내고, 또 삭방을 평정하여 대왕 탁발식익건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옮기니――북방이 여기서 모두 부견에게 병합되었다. 정축년(丁丑年, 377년), 천하가 마침내 진·진 남북 대치의 국면이 되었다.
戊寅 晉作新宮。己卯 晉敗秦軍於淮南,遂拔秦襄陽。庚辰 晉李遜以交阯叛,秦苻洛以和龍叛。辛巳 晉謝石為尚書僕射。桓石攻秦有功。四夷六十二國修貢於秦。壬午。癸未 晉伐蜀,敗秦軍於武當。秦苻堅舉國南伐。晉謝安帥謝琰、謝玄、桓沖、桓伊大敗秦師於肥水,進圍洛陽。秦苻堅喪師壽陽,秦苻融沒於戰,諸將咸叛。慕容垂稱王滎陽,北居中山,國曰燕,元曰燕元,是謂後燕。攻苻丕於鄴。丁零翟斌以行唐叛。仇池公楊世入於晉。
무인년(戊寅年, 378년), 동진이 신궁을 건축했다. 기묘년(己卯年, 379년), 진·진 양군이 회남에서 교봉하여 형양이 손을 바꾸었다(이 해는 실은 전진이 진의 형양을 함락한 것인데 저본이 주객을 서로 뒤집었다). 경진년(庚辰年, 380년), 진의 장수 이손(李遜)이 교지에 의거하여 반역하고, 전진의 종실 부락(苻洛)이 화룡에 의거하여 반역했다. 신사년(辛巳年, 381년), 동진이 사석(謝石)을 상서복야로 삼고 환석건이 진을 쳐서 공이 있었다. 사방 예순두 국이 전진에 조공하니 부견의 성세가 지극히 성했다. 임오년(壬午年, 382년)은 기록할 것이 없다. 계미년(癸未年, 383년), 진이 군사를 내어 촉을 치고 무당(武當)에서 진군을 격파했다. 부견이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남벌하니, 사안이 사염(謝琰)·사현(謝玄)·환충·환이(桓伊) 등을 통솔하여 진군을 비수(淝水)에서 크게 격파하고 승세를 타 나아가 낙양을 포위했다. 부견이 수양에서 군사를 잃고 그 아우 부융(苻融)이 전사하며 여러 장수가 다투어 배리했다――모용수가 형양(滎陽)에서 왕을 칭하고 북으로 중산에 의거하여 국호를 「연」, 연호를 「연원(燕元)」이라 하니 이가 후연(後燕)이며, 아울러 업성을 지키는 부비(苻丕)를 진공했다. 정령인(丁零人) 적빈(翟斌)이 행당(行唐)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구지공 양세도 동진에 귀부했다.
甲申 晉假謝安黃鉞,都督軍事,鎮廣陵,領荊、江十五州,復襄陽。秦苻朗以青州降,秦苻堅來,乞師,遣劉牢之救鄴。秦將姚萇稱王萬年,國曰秦,元曰白雀,是謂後秦。慕容沖稱王阿房,慕容泓稱王華池,慕容永稱王長子,呂光稱王酒泉。萇、沖稱兵進逼長安。燕北伐高句麗,復遼東故也。
갑신년(甲申年, 384년), 동진이 사안에게 황월·도독제군사를 수여하고 나가 광릉을 진수하여 형·강 등 십오 주를 통령하고 형양을 수복했다. 전진의 부랑(苻朗)이 청주로 진에 항복했다. 부견이 사신을 보내 진에 원조를 청하니 진이 유노지(劉牢之)를 보내 업을 구했다. 전진의 강장(羌將) 요장(姚萇)이 만년(萬年)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진」, 연호를 「백작(白雀)」이라 했으니――이가 후진(後秦)이다. 모용충(慕容沖)이 아방(阿房)에서 왕을 칭하고, 모용홍(慕容泓)이 화지(華池)에서 왕을 칭하고, 모용영(慕容永)이 장자(長子)에서 왕을 칭하고, 여광(呂光)이 주천(酒泉)에서 왕을 칭했다――비수의 한 싸움 뒤에 부견이 통일한 북방이 경각에 와해했다. 요장·모용충이 각기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핍박했다. 후연이 북으로 고구려를 쳐서 요동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했다.
乙酉 晉謝安救秦,至於長安,復洛陽而還,卒。秦苻堅沒於姚萇,子丕自鄴攻晉陽,稱帝,改元太安。慕容沖屠長安。秦將乞伏國仁稱牧洮罕,國曰秦,元曰建義,是謂西秦。燕慕容垂南平鄴,徙都之。秦姚萇獲苻堅於五將山,歸殺之於新市。是年,冒頓拓跋什翼珪稱王定襄之成樂,國曰魏,元曰登國,是謂後魏道武皇帝。
을유년(乙酉年, 385년), 동진이 군사를 내어 진을 구하고 장안 일대에 이르러 낙양을 수복한 뒤 반사했다. 사안도 이 해에 세상을 떠났다. 전진의 부견이 요장의 손에 떨어지고 그 아들 부비가 업성에서 나가 진양을 치고 이어서 황제를 칭하여 원년을 고쳐 「태안(太安)」이라 했다. 모용충이 장안에 쳐들어가 크게 도륙했다. 전진의 장령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스스로 목수(牧守)를 칭하고(저본은 도한(洮罕)으로 하는데 그 땅은 실은 원천(苑川)에 있다), 국호를 「진」, 연호를 「건의(建義)」라 했으니――이가 서진(西秦)이다. 후연의 모용수가 남하하여 업성을 평정하고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다. 요장이 오장산(五將山)에서 부견을 사로잡아 신평(新平)으로 끌고 가 교살했다(저본은 신시(新市)로 한다). 이 해에 또한 탁발규(拓跋珪)가 정양의 성락(盛樂)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위」, 연호를 「등국(登國)」이라 했으니――곧 북위 도무황제(道武皇帝)이며, 훗날 북방을 통일하는 힘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丙戌 秦苻丕為慕容永所敗,走晉東垣,為晉將馮該所殺。其眾奔杏城。苻登稱帝於隴東,改元太初。苻堅將呂光稱牧姑臧,國曰涼,元曰太安,是謂後涼。燕慕容垂稱帝於鄴,改元建興。慕容沖為將段隨、韓延所害,其眾奔垂。慕容永稱帝長子。秦姚萇稱帝,徙居長安,改元建初。
병술년(丙戌年, 386년), 전진의 부비가 모용영에게 패하여 동진 경내의 동원(東垣)으로 달아났다가 진의 장수 풍해(馮該)에게 죽임당하고 부중이 흩어져 행성(杏城)으로 달아났다. 부등(苻登)이 농동(隴東)에서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태초(太初)」라 하여 전진의 국조를 이었다. 부견의 옛 장수 여광이 고장에서 스스로 양주목을 칭하고 국호를 「량」, 연호를 「태안(太安)」이라 했으니――이가 후량(後涼)이다. 후연의 모용수가 업에서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건흥(建興)」이라 했다. 모용충이 부장 단수(段隨)·한연(韓延)에게 해를 당하고 남은 무리가 모용수에게 투신했다. 모용영이 장자에서 황제를 칭하니――이가 서연(西燕)이다. 후진의 요장이 황제를 칭하고 장안으로 옮겨 원년을 고쳐 「건초(建初)」라 했다. 이 해 북방에서 여러 나라가 나란히 서서 형세가 가장 분란했다.
丁亥 晉以子德宗為太子,敗翟遼於洛口。秦苻登東攻姚萇,封乞伏國仁為苑川王。戊子 秦苻登攻姚萇不利,秦乞伏國仁卒,弟乾歸立,稱河南王,改元太初,徙都金城。己丑 晉陸納為尚書令。彭城妖賊亂。翟遼圍滎陽。秦姚萇西攻苻登。涼呂光稱三河王,改元麟嘉。
정해년(丁亥年, 387년), 동진이 황자 사마덕종(司馬德宗)을 세워 태자로 삼고 낙구(洛口)에서 정령의 적료(翟遼)를 격파했다. 전진의 부등이 동쪽으로 요장을 치고 서진의 걸복국인을 원천왕(苑川王)에 봉하여 오원(奧援)으로 삼았다. 무자년(戊子年, 388년), 부등이 요장을 쳐서 실리를 잃었다. 서진의 걸복국인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우 걸복건귀(乞伏乾歸)가 뒤를 이어 하남왕(河南王)을 칭하고 원년을 고쳐 「태초(太初)」라 하며 도읍을 금성으로 옮겼다. 기축년(己丑年, 389년), 동진이 육납(陸納)을 상서령으로 삼았다. 팽성에 요술로 무리를 모으는 자가 난을 일으켰다. 적료가 형양을 포위하여 쳤다. 후진의 요장이 서쪽으로 부등을 쳤다. 후량의 여광이 스스로 삼하왕(三河王)을 칭하고 원년을 고쳐 「린가(麟嘉)」라 했다.
庚寅 晉敗翟遼於滑臺。永嘉寇亂。秦苻登攻姚萇不利。辛卯 晉王珣為左僕射,謝琰為右僕射。壬辰 晉蔣喆以青州亂。慕容垂平丁零翟釗於滑臺。西秦乞伏乾歸開地至巴及隴。癸巳 秦苻登攻姚萇,不利。秦姚萇卒,子興繼,去帝稱王。
경인년(庚寅年, 390년), 진군이 활대(滑台)에서 적료를 격파했다. 영가 일대에 구란이 일어났다. 전진의 부등이 요장을 쳐서 또 실리를 잃었다. 신묘년(辛卯年, 391년), 동진이 왕순(王珣)을 좌복야, 사염을 우복야로 삼았다. 임진년(壬辰年, 392년), 장철(蔣喆)이 청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후연의 모용수가 활대에서 정령의 적초(翟釗)를 평정하여 적위(翟魏)가 멸망했다. 서진의 걸복건귀가 강토를 개척하여 동으로 파 땅에 이르고 북으로 농우에 미쳤다. 계사년(癸巳年, 393년), 부등이 다시 요장을 쳐서 또 이롭지 못했다. 후진의 요장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요흥(姚興)이 뒤를 이어 잠시 제호를 버리고 다만 왕을 칭했다.
경세지묘(經世之卯) 二千二百四十八
甲午 東晉孝武帝二十二年,後魏道武皇帝十年,秦苻登攻姚興不利,戰死,子崇立,奔湟中,稱帝,改元延初,為乞伏乾歸所滅。燕慕容垂平慕容永於長子。秦姚興復稱帝槐裡,改元皇初。涼呂光徙居樂都。乙未 燕慕容垂攻魏,不利。魏破燕師於參合陂。
갑오년(甲午年)은 동진 효무제 재위 22년, 북위 도무제 10년, 394년이다. 전진의 부등이 요흥을 진공하다 실리를 잃고 전사하고 그 아들 부숭(苻崇)이 뒤를 이어 황중(湟中)으로 달아나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연초(延初)」라 했으나 곧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멸해져 전진이 나라를 잃었다. 후연의 모용수가 장자에서 서연의 모용영을 소멸했다. 후진의 요흥이 괴리(槐里)에서 제호를 회복하고 원년을 고쳐 「황초(皇初)」라 했다. 후량의 여광이 치소를 낙도(樂都)로 옮겼다. 을미년(乙未年, 395년), 후연의 모용수가 북위를 쳐서 실리를 잃고 북위가 참합파(參合陂)에서 연군을 크게 격파하고 항병 수만을 갱살(坑殺)하니――연·위의 강약의 형세가 이로부터 역전되었다.
丙申 晉武帝泛舟於泉池,沒,太子德宗嗣位,是謂安帝。會稽王道子專政。燕慕容垂拔魏平城。垂卒於上谷,子寶繼,改元永康。太原陷於魏。魏拔燕幷州,圍中山,稱帝,改元皇始。涼呂光稱天王,改元龍飛。丁酉 晉改元隆安。兗州王恭、豫州庾楷、吳郡王欽各以城叛。燕慕容寶北走龍城。慕容詳稱帝中山,慕容麟殺詳代立。慕容德自丁零入,又殺麟代立,徙居鄴。中山陷於魏。呂光寇西秦,自金城復徙居苑川。涼呂光將禿髮烏孤稱王廉川,國曰涼,元曰太初,是謂南涼。涼呂光將沮渠蒙遜立段業為牧於張掖,國曰涼,元曰神璽,是謂北涼。
병신년(丙申年, 396년), 진효무제가 천지(泉池)에서 배를 띄운 뒤에 죽었는데(사(史)에는 그 총비 장귀인(張貴人)에게 시해되었다고 실려 있다), 태자 사마덕종이 뒤를 이었으니 곧 진안제(晉安帝)이다. 안제가 어둡고 나약하여 회계왕 사마도자(司馬道子)가 권력을 독차지했다. 후연의 모용수가 북위의 평성을 함락했으나 회군하는 도중 상곡(上谷)에서 병사하고 그 아들 모용보(慕容寶)가 뒤를 이어 원년을 고쳐 「영강(永康)」이라 했다. 태원이 곧 북위에 함락되었다. 북위가 후연의 병주를 함락하고 중산을 포위하며, 탁발규가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황시(皇始)」라 했다. 후량의 여광이 천왕을 칭하고 원년을 고쳐 「용비(龍飛)」라 했다. 정유년(丁酉年, 397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융안(隆安)」이라 하고 연주의 왕공(王恭)·예주의 우해(庾楷)·오군(吳郡)의 왕흠(王廞)이 각기 본주에 의거하여 반역했다. 후연의 모용보가 북으로 용성(龍城)으로 달아났다. 모용상(慕容詳)이 중산에서 황제를 칭하고, 모용린(慕容麟)이 상을 죽이고 자립하며, 모용덕(慕容德)이 정령 경내에서 중산에 들어가 또 린을 죽이고 자립한 뒤 업성으로 옮겼다. 중산이 마침내 북위에 빼앗겼다. 여광이 서진을 진공하니 서진이 금성에서 원천으로 되돌아갔다. 여광의 부장 독발오고(禿髮烏孤)가 염천(廉川)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량」, 연호를 「태초(太初)」라 했으니――이가 남량(南涼)이다. 또 다른 부장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장액(張掖)에서 단업(段業)을 옹립하여 양주목으로 하고 국호를 「량」, 연호를 「신새(神璽)」라 했으니――이가 북량(北涼)이다.
戊戌 晉北伐燕,師敗於管城。兗州王恭、豫州庾楷、荊州桓玄兵犯建業,敗內師於白石。假會稽王道子黃鉞。玄師敗走潯陽。杜冏以京口亂。燕慕容寶南伐,至於黎陽乃復。將蘭汗殺寶代立於龍城,稱昌黎王,改元青龍。寶子盛誅蘭汗,稱王,改元建平,稱帝,再改元長樂。鄴陷於魏。范陽王慕容德自鄴南走滑臺,稱王,改元年,是謂南燕。魏拔燕之鄴及信都,改元大興,自盛樂徙居平城。涼禿髮烏孤克金城,敗呂光於街亭,稱武威天王。
무술년(戊戌年, 398년), 동진이 북으로 후연을 쳐서 관성(管城)에서 패적했다. 연주의 왕공·예주의 우해·형주의 환현(桓玄)이 군사를 일으켜 건업을 진범하고 백석에서 경사의 군사를 격파했다. 조정이 회계왕 사마도자에게 황월을 수여하여 응전하니 환현이 패하여 심양으로 물러났다. 두경(杜冏)이 또 경구에서 난을 일으켰다. 후연의 모용보가 남벌하여 여양(黎陽)에 이르자 되돌아갔다. 부장 난한(蘭汗)이 용성에서 모용보를 죽이고 자립하여 창려왕(昌黎王)을 칭하고 원년을 고쳐 「청룡(青龍)」이라 했다.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慕容盛)이 난한을 주살하고 먼저 왕을 칭하여 원년을 「건평(建平)」으로 하고 이어 황제를 칭하여 원년을 「장락(長樂)」으로 했다. 업성이 북위에 함락되고 범양왕 모용덕이 업에서 남으로 활대로 달아나 왕을 칭하고 건호했으니――이가 남연(南燕)이다. 북위가 후연의 업성과 신도(信都)를 함락하고 원년을 고쳐 「천흥(天興)」(저본은 대흥(大興))이라 하며 도읍을 성락에서 평성으로 옮겼다. 남량의 독발오고가 금성을 함락하고 가정(街亭)에서 여광을 격파하여 스스로 무위천왕(武威天王)을 칭했다.
己亥 秦姚興拔晉洛陽,燕慕容德拔晉青州。仇池楊盛稱藩於晉。妖賊孫恩陷晉會稽,晉謝琰、劉牢之往伐。劉裕始參軍政。秦姚興去帝號稱王,改元洪始。魏南攻滑臺。涼呂光傳子紹位,稱太上皇。光卒,兄纂殺紹代立。涼禿髮烏孤徙居樂都,烏孤卒,弟利鹿孤立,又徙居西平,仍附於姚興。涼段業稱天王,改元天璽,大將沮渠蒙遜出守西安。燕慕容德逐闢閭渾於廣固,徙居之滑臺。沒於魏。
기해년(己亥年, 399년), 후진의 요흥이 진의 낙양을 함락하고, 남연의 모용덕이 진의 청주를 함락하며, 구지의 양성(楊盛)이 진에 번을 칭했다. 오두미도의 수령 손은(孫恩)이 군사를 일으켜 회계를 함락하니 진이 사염·유노지를 보내 정벌했다. 유유(劉裕)가 곧 이 싸움 가운데 군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훗날 진을 대신하여 송을 세우는 인물이 여기서 등장했다. 후진의 요흥이 제호를 버리고 다만 왕을 칭하며 원년을 고쳐 「홍시(弘始)」(저본은 홍시(洪始))라 했다. 북위가 남으로 활대를 쳤다. 후량의 여광이 지위를 아들 여소(呂紹)에게 전하고 스스로 태상황(太上皇)을 칭했다. 여광이 죽자 여소의 형 여찬(呂纂)이 소를 죽이고 자립했다. 남량의 독발오고가 낙도로 옮겨 살고 오고가 죽자 그 아우 독발이록고(禿髮利鹿孤)가 뒤를 이어 또 서평(西平)으로 옮겨 살았으나 여전히 요흥에게 의부했다. 북량의 단업이 천왕을 칭하고 원년을 고쳐 「천새(天璽)」라 하며 대장 저거몽손이 나가 서안(西安)을 지켰다. 남연의 모용덕이 벽려혼(辟閭渾)을 광고에서 몰아내고 거기로 옮겨 살았다――원래 차지하던 활대는 북위의 손에 떨어졌다.
庚子 晉司馬劉裕敗孫恩於臨海,以揚州元顯為十六州都督。燕慕容盛去帝號,稱庶人天王,破高句麗。秦姚興破西秦,俘其王乞伏乾歸於長安。涼呂纂改元咸寧,大司馬呂宏殺纂,不克。涼利鹿孤改元建和。涼將李暠稱牧秦州,國曰涼,元曰庚子,是謂西涼。燕慕容德稱帝廣固,改元建平。辛丑 晉平孫恩,劉裕出守下邳。燕慕容盛將段璣行殺盛,叔父熙誅璣,稱帝,改元光始。秦姚興放乞伏乾歸還苑川。涼呂超殺其君纂,立其兄隆,改元神鼎,稱藩於姚興。涼禿髮利鹿孤稱河西王。涼大將沮渠蒙遜自西安入,殺段業,代立,改元永安。
경자년(庚子年, 400년), 진의 장수 유유가 임해(臨海)에서 손은을 격파했다. 조정이 양주자사 사마원현(司馬元顯)을 십육 주의 도독으로 삼았다. 후연의 모용성이 제호를 버리고 서인천왕(庶人天王)으로 개칭하고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격파했다. 후진의 요흥이 서진을 격파하고 서진왕 걸복건귀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데려갔다. 후량의 여찬이 원년을 고쳐 「함녕(咸寧)」이라 하고 대사마 여굉(呂弘)이 여찬을 모살하려다 이루지 못했다. 남량의 이록고가 원년을 고쳐 「건화(建和)」라 했다. 량의 장수 이호(李暠)가 스스로 진주목을 칭하고(실은 돈황(敦煌)에 의거함), 국호를 「량」, 연호를 「경자(庚子)」라 했으니――이가 서량(西涼)이다. 남연의 모용덕이 광고에서 황제를 칭하고 원년을 고쳐 「건평(建平)」이라 했다. 신축년(辛丑年, 401년), 동진이 손은의 난을 평정하고 유유가 나가 하비(下邳)를 지켰다. 후연의 단기(段璣)가 모용성을 자살하고, 성의 숙부 모용희(慕容熙)가 단기를 주살하고 황제를 칭하여 원년을 고쳐 「광시(光始)」라 했다. 후진의 요흥이 걸복건귀를 원천으로 놓아 돌려보냈다. 후량의 여초(呂超)가 그 임금 여찬을 죽이고 그 형 여융(呂隆)을 세워 원년을 고쳐 「신정(神鼎)」이라 하고 요흥에게 번을 칭했다. 남량의 독발이록고가 하서왕(河西王)으로 개칭했다. 북량의 대장 저거몽손이 서안에서 장액에 들어가 단업을 죽이고 자립하여 원년을 고쳐 「영안(永安)」이라 했다.
壬寅 晉改元元興。桓玄據荊州建牙夏口。假揚州元顯黃鉞,顯軍敗,玄入於建業,稱侍中丞相,錄尚書事,又稱太尉,總百揆,乃殺都督元顯及會稽王道子,以琅玡王德文為太宰,改元大亨。劉軌以冀州叛。秦姚興伐呂光有功,拒魏不利。魏敗秦軍於蒙坑。涼禿髮利鹿孤卒,弟傉檀立,改元弘昌,徙居樂都。涼沮渠蒙遜稱藩於姚興。癸卯 晉加桓玄九錫,稱相國、楚王,用天子器服。玄竊命,徙其帝於永安宮,降為平固王,遷之潯陽,改國曰楚,元曰永始。
임인년(壬寅年, 402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원흥(元興)」이라 했다. 형주자사 환현이 하구(夏口)에서 아를 세워 군사를 일으키니 조정이 양주자사 사마원현에게 황월을 수여하여 맞이 싸우게 했으나 원현이 패하고 환현이 건업에 들어가 스스로 시중·승상·록상서사를 칭하고 또 태위·총백규(總百揆)를 칭하며, 도독 사마원현과 회계왕 사마도자를 죽이고, 낭야왕 사마덕문(司馬德文)을 태재로 삼아 원년을 고쳐 「대형(大亨)」이라 했다. 유궤(劉軌)가 기주에 의거하여 반역했다. 후진의 요흥이 후량을 토벌하여 공이 있었으나 북위를 막아서는 실리를 잃고 북위가 몽갱(蒙坑)에서 진군을 격파했다. 남량의 독발이록고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우 독발노단(禿髮傉檀)이 뒤를 이어 원년을 고쳐 「홍창(弘昌)」이라 하고 낙도로 옮겨 살았다. 북량의 저거몽손이 요흥에게 번을 칭했다. 계묘년(癸卯年, 403년), 동진이 환현에게 구석을 더하여 상국·초왕(楚王)을 칭하고 천자의 기복을 썼다. 이어서 환현이 위를 찬탈하여 진안제를 영안궁(永安宮)으로 옮기고 평고왕(平固王)으로 낮추며 다시 심양으로 옮기고, 국호를 「초」, 연호를 「영시(永始)」로 고쳤다.
甲辰 晉帝在潯陽。劉裕唱義,帥沛國劉毅、東海何無忌二州兵,大破桓玄兵於京口,又敗玄將桓宏於廣陵、吳甫之於江乘、皇甫敷於羅落。玄逼帝走江陵。裕又敗玄兵於湓口。玄復逼帝東下。裕又敗玄兵於崢嶸洲,又破之於覆舟山,迎帝入江陵。玄敗死於枚洄洲、其將桓振復陷江陵,幽帝。譙縱以成都叛,稱王。秦姚興入十二郡,修貢於晉。魏改元天錫。涼呂隆奔姚興,國亡。涼傉檀去王號,求姑臧於姚興。燕慕容德卒,兄之子超立。
갑진년(甲辰年, 404년), 진안제가 심양에 갇혀 있었다. 유유가 의기를 들어 패국(沛國) 유의(劉毅)·동해(東海) 하무기(何无忌) 등 두 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경구에서 환현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또 잇달아 환현의 부장 환굉(桓弘)을 광릉에서, 오보지(吳甫之)를 강승(江乘)에서, 황보부(皇甫敷)를 나락교(羅落橋)에서 격파했다. 환현이 안제를 협지하여 서쪽 강릉으로 달아나니 유유가 또 분구(湓口)에서 그 군사를 격파했다. 환현이 다시 황제를 협지하여 동하하니 유유가 쟁용주(崢嶸洲)·복주산(覆舟山)에서 잇달아 적을 격파하고 안제를 맞아 강릉에 들였다. 환현이 매회주(枚回洲)에서 패사하고 그 장수 환진(桓振)이 또 강릉을 함락하여 안제를 유금했다. 초종(譙縱)이 성도에 의거하여 반역하고 왕을 칭하니 곧 초촉(譙蜀)이다. 후진의 요흥이 십이 군을 거두어 들이고 동시에 진에 공을 닦았다. 북위가 원년을 고쳐 「천사(天賜)」(저본은 천석(天錫))라 했다. 후량의 여융이 요흥에게로 달아나니 후량이 나라를 잃었다. 남량의 독발노단이 왕호를 버리고 요흥에게 고장의 땅을 청했다. 남연의 모용덕이 세상을 떠나고 형의 아들 모용초(慕容超)가 뒤를 이었다.
乙巳 晉平桓振,帝自江陵還建業,改元義熙。劉裕都督中外、錄尚書事,還鎮丹徒。涼傉檀受姚興命,徙姑臧。燕慕容超改元太上。涼李暠徙居酒泉,改元建初,稱藩於晉。丙午 晉伐蜀,敗譙縱於白帝。孔安國為尚書左僕射,大將軍劉裕開府京口。仇池楊盛稱藩。燕慕容超三將奔晉。燕慕容熙將馮跋殺熙,立慕容云,複姓高氏,稱王,改元正始。秦姚興將赫連勃勃稱天王於朔方,國曰夏,元曰龍升。
을사년(乙巳年, 405년), 동진이 환진을 평정하고 안제가 강릉에서 건업으로 돌아와 원년을 고쳐 「의희(義熙)」라 했다. 유유가 도독중외제군사·록상서사가 되고 돌아가 단도(丹徒)를 진수했다――동진의 병권이 이로부터 유유에게 돌아갔다. 남량의 독발노단이 요흥의 명을 받아 고장으로 옮겨 살았다. 남연의 모용초가 원년을 고쳐 「태상(太上)」이라 했다. 서량의 이호가 주천으로 옮겨 살고 원년을 고쳐 「건초(建初)」라 하며 동진에 번을 칭했다. 병오년(丙午年, 406년), 동진이 촉을 쳐서 백제성에서 초종을 격파했다. 공안국(孔安國)이 상서좌복야가 되고 대장군 유유가 경구에서 부를 열었다. 구지의 양성이 진에 번을 칭했다. 남연의 모용초의 부하 세 장령이 진나라에 투신했다. 후연의 풍발(馮跋)이 모용희를 죽이고 모용운(慕容雲)을 옹립했다. 운의 본성은 고(高)이므로 곧 본성으로 회복하고 천왕을 칭하며 원년을 고쳐 「정시(正始)」라 했으니――이가 북연(北燕)이다. 후진의 요흥의 부장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삭방에서 천왕을 칭하고 국호를 「하(夏)」, 연호를 「용승(龍升)」이라 하니 곧 혁련하(赫連夏)이다.
丁未 晉劉裕入朝,殺東陽太守殷仲文、南蠻校尉殷叔文、晉陵太守殷道叔、永嘉太守駱求。姚興攻禿髮傉檀及赫連勃勃。乞伏乾歸復稱王苑川,改元更始。涼禿髮傉檀攻沮渠蒙遜及赫連勃勃。戊申 晉劉裕入總朝政,北敗慕容超於臨朐,出大峴,進圍廣固。魏國亂,後萬人同子申殺其君珪,次子紹誅萬人及申,自立,是謂明帝。秦乾歸南攻姚興。涼傉檀復稱王姑臧,改元嘉平。夏勃勃南攻姚興。
정미년(丁未年, 407년), 유유가 조정에 들어가 동양태수(東陽太守) 은중문(殷仲文)·남만교위(南蠻校尉) 은숙문(殷叔文)·진릉태수(晉陵太守) 은도숙(殷道叔)·영가태수(永嘉太守) 낙구(駱求) 등 환현의 옛 당을 주살했다. 후진의 요흥이 군사를 내어 남량의 독발노단과 하국의 혁련발발을 진공했다. 걸복건귀가 원천에서 왕호를 회복하고 원년을 고쳐 「경시(更始)」라 하니 서진이 나라를 회복했다. 남량의 독발노단은 양면으로 군사를 써서 북량의 저거몽손과 혁련발발을 진공했다. 무신년(戊申年, 408년), 유유가 조정에 들어가 정무를 총람하고 이어서 북벌하여 임우(臨朐)에서 남연의 모용초를 격파하고 대현산(大峴山)을 넘어 나아가 광고를 포위했다. 북위에 내란이 일어나 도무제 탁발규가 시해되고(저본은 이 구절의 문자가 잘못되고 빠져서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 아들 탁발사(拓跋嗣)가 난당을 주제하고 자립했으니 곧 북위 명원제(明元帝)이다. 서진의 걸복건귀가 남으로 요흥을 쳤다. 남량의 독발노단이 고장에서 다시 량왕을 칭하고 원년을 고쳐 「가평(嘉平)」이라 했다. 하의 혁련발발도 남으로 요흥을 치니――후진이 사면에서 적을 받았다.
己酉 晉劉裕滅南燕,徙慕容超於建業。後燕國亂,苻將馮跋用倖臣離班殺云,代立,稱天王,改元太平,是謂北燕。魏改元永興。秦乾歸平袍罕。夏赫連勃勃(魏史雲賀大人及子如弒珪),攻姚興。庚戌 晉始興賊盧循兵寇建業,劉裕大破之。循走潯陽,再破之於豫章。裕假黃鉞。蜀兵陷巴東。秦乞伏乾歸為兄之子公府所殺,子熾盤誅公府而自立,改元永康。涼沮渠蒙遜攻李暠有功,夏赫連勃勃攻姚興不利。
기유년(己酉年, 409년), 유유가 남연을 멸하고 모용초를 건업으로 압송하여 처형했다. 후연이 내란하여 풍발이 총신 이반(離班)의 손을 빌려 고운(高雲)을 죽이고 자립하여 천왕을 칭하고 원년을 고쳐 「태평(太平)」이라 했으니――이가 북연이다. 북위가 원년을 고쳐 「영흥(永興)」이라 했다. 서진의 걸복건귀가 부한을 평정했다(저본은 포한(袍罕)). 하의 혁련발발이 계속 요흥을 쳤다――저본의 여기에 소주(小注) 「위사(魏史)에 이르기를 하대인(賀大人)과 아들 여(如)가 규를 시했다」를 끼웠는데, 교자가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탁발규가 시해당한 일을 보충한 것이다. 경술년(庚戌年, 410년), 손은의 남은 당 노순(盧循)이 시흥(始興)에서 군사를 일으켜 건업을 진범하니 유유가 크게 격파했다. 노순이 심양으로 달아나고 또 예장(豫章)에서 패했다. 유유가 공으로 황월을 받았다. 촉군이 파동을 함락했다. 서진의 걸복건귀가 형의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에게 살해되고 그 아들 걸복치반(乞伏熾磐)이 공부를 주살하고 자립하여 원년을 고쳐 「영강(永康)」이라 했다. 북량의 저거몽손이 서량의 이호를 쳐서 공이 있고, 하의 혁련발발이 요흥을 쳐서 이롭지 못했다.
辛亥 晉劉裕南敗盧循,盧循走交州,死。劉毅以江陵叛。涼沮渠蒙遜攻禿髮傉檀有功,夏赫連勃勃攻姚興不克。壬子 晉劉裕殺劉藩及謝琨,遂平劉毅於江陵。涼傉檀徙居樂都,姑臧陷於沮渠蒙遜。涼蒙遜拔禿髮傉檀姑臧,徙居之,稱西河王,改元弘始。癸丑 晉朱齡石平蜀。魏改元神瑞,與秦姚興和親。秦熾盤破土谷渾於澆河。涼傉檀攻蒙遜不利。夏改元鳳翔,城統萬。
신해년(辛亥年, 411년), 유유가 남하하여 노순을 격파하고 노순이 교주로 달아나 패하여 죽었다. 유의가 강릉에 의거하여 반역했다. 북량의 저거몽손이 남량의 독발노단을 쳐서 공이 있고, 하의 혁련발발이 요흥을 쳐서 이기지 못했다. 임자년(壬子年, 412년), 유유가 유번(劉藩)·사혼(謝混)(저본은 사곤(謝琨))을 죽이고 곧 강릉의 유의를 평정했다. 남량의 독발노단이 낙도로 옮겨 살고 고장이 실수했다. 북량의 저거몽손이 고장을 빼앗아 거기로 옮겨 살고 스스로 하서왕을 칭하고(저본은 서하왕(西河王)), 원년을 고쳐 「현시(玄始)」(저본은 홍시(弘始))라 했다. 계축년(癸丑年, 413년), 진의 장수 주령석(朱齡石)이 촉 땅을 평정하여 초촉이 멸망했다. 북위가 원년을 고쳐 「신서(神瑞)」라 하고 후진의 요흥과 화친했다. 서진의 걸복치반이 교하(澆河)에서 토곡혼(吐谷渾)을 격파했다. 남량의 독발노단이 몽손을 쳐서 이롭지 못했다. 하가 원년을 고쳐 「봉상(鳳翔)」이라 하고 통만성(統萬城)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
甲寅 秦乞伏熾盤滅南涼禿髮傉檀。乙卯 晉荊州刺史司馬休之、雍州刺史魯宗之叛裕,攻破之,逐之於江陵。劉穆之為尚書左僕射。秦姚興卒,子浤繼。弟弼作亂,不克。魏改元太常。丙辰 晉劉裕北伐姚泓。拔洛陽,進逼潼關。加裕九錫,總百揆,封宋國公。秦姚泓改元永和。洛陽陷於晉。姚懿、姚恢內叛,兵逼長安,姚紹平之。秦乞伏熾磐拔沮渠蒙遜河湟,夏赫連勃勃拔姚泓陰密。
갑인년(甲寅年, 414년), 서진의 걸복치반이 남량을 멸하고 독발노단을 사로잡았다. 을묘년(乙卯年, 415년), 동진의 형주자사 사마휴지(司馬休之)·옹주자사 노종지(魯宗之)가 군사를 일으켜 유유를 거슬렀으나 유유에게 격파되어 강릉에서 쫓겨났다. 유목지(劉穆之)가 상서좌복야가 되었다. 후진의 요흥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요홍(姚泓)이 뒤를 이었는데(저본은 홍(浤)), 그 아우 요필(姚弼)이 난을 일으켰으나 이루지 못했다. 북위가 원년을 고쳐 「태상(泰常)」(저본은 태상(太常))이라 했다. 병진년(丙辰年, 416년), 유유가 북으로 요홍을 쳐서 낙양을 함락하고 동관(潼關)을 핍박했다. 조정이 유유에게 구석·총백규를 더하고 송국공(宋國公)에 봉했다. 후진이 원년을 고쳐 「영화(永和)」라 했다. 낙양이 마침내 진에 함락되었다. 요의(姚懿)·요회(姚恢)가 안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핍박했으나 요소(姚紹)에게 평정되었다. 서진의 걸복치반이 북량의 하황(河湟)의 땅을 함락하고, 하의 혁련발발이 후진의 음밀(陰密)을 함락했다.
丁巳 晉劉裕平長安,滅後秦,執姚泓以歸,以子義真守長安。裕加宋王。魏南攻晉,兵敗於河西。涼李暠卒,子歆立,改元嘉興。戊午 晉劉裕弒其君德宗,立其弟琅玡王德文,是謂恭帝。長安陷於夏。涼李歆稱藩於晉。夏赫連勃勃拔晉之長安稱帝,改元武昌。己未 晉改元元熙。宋王劉裕自揚州入,用天子服器。秦乞伏熾磐改元建弘。夏赫連勃勃還居統萬,改元真興。
정사년(丁巳年, 417년), 유유가 장안을 평정하고 후진을 멸하며 요홍을 사로잡아 돌아오고 둘째 아들 유의진(劉義真)을 남겨 장안을 진수하게 했다. 유유가 작위를 올려 송왕(宋王)이 되었다. 북위가 남으로 동진을 쳐서 하서에서 패했다. 서량의 이호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이흠(李歆)이 뒤를 이어 원년을 고쳐 「가흥(嘉興)」이라 했다. 무오년(戊午年, 418년), 유유가 진안제 사마덕종을 시살하고 그 아우 낭야왕 사마덕문을 세웠으니 곧 진공제(晉恭帝)이다. 장안이 하에 빼앗기고 혁련발발이 장안을 함락한 뒤 황제를 칭하여 원년을 고쳐 「창무(昌武)」(저본은 무창(武昌))라 했다. 서량의 이흠이 진에 번을 칭했다. 기미년(己未年, 419년), 동진이 원년을 고쳐 「원희(元熙)」라 했다. 송왕 유유가 양주에서 조정에 들어와 천자의 거복 기물을 쓰니――진을 대신할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다. 서진의 걸복치반이 원년을 고쳐 「건홍(建弘)」이라 했다. 혁련발발이 통만으로 돌아가 살고 원년을 고쳐 「진흥(真興)」이라 했다.
庚申 劉裕代晉命於揚州,是謂武帝,改國號曰宋,元曰永初,降其君德文為零陵王。辛酉 宋零陵王德文卒。壬戌 宋武帝劉裕終,子義符繼。魏攻宋滑臺。癸亥 宋改元景平。魏攻宋金墉。明帝終,太子燾繼,是謂太武皇帝。涼沮渠蒙遜滅西涼,執李歆歸於姑臧。
경신년(庚申年, 420년), 유유가 양주에서 진의 선양을 받으니――이가 송무제(宋武帝)이며, 국호를 「송(宋)」으로 고치고 연호를 「영초(永初)」로 하고 진공제 사마덕문을 영릉왕(零陵王)으로 낮췄다――동진 백여 년의 국조가 여기서 끝나고 남조(南朝)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유년(辛酉年, 421년), 영릉왕 사마덕문이 해를 당해 죽었다. 임술년(壬戌年, 422년), 송무제 유유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유의부(劉義符)가 뒤를 이었다. 북위가 상사를 틈타 송의 활대를 진공했다. 계해년(癸亥年, 423년), 송이 원년을 고쳐 「경평(景平)」이라 했다. 북위가 송의 금용을 진공했다. 위의 명원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탁발도(拓跋燾)가 뒤를 이었으니 곧 위태무제(魏太武帝)이다. 북량의 저거몽손이 서량을 멸하고 이흠을 사로잡아 고장으로 돌아왔다.
